'이스라엘'에 해당되는 글 18건

  1. 2010/01/15 [사사기와 대중문화의 만남(3)] 하나님 앞에서 다름과 틀림 (1)
  2. 2010/01/14 [사사기와 대중문화의 만남(2)] 기드온과 유재석
  3. 2010/01/13 [사사기와 대중문화의 만남(1)] 영화 300과 공부의 신 (2)
  4. 2009/12/28 [이사야-아모스와 대중문화의 만남(3)] 종교 잔치 필요 없다!
  5. 2009/12/16 [이사야-아모스와 대중문화의 만남(2)] 대중문화 속에서 하나님 만나기 (1)
  6. 2009/12/15 [이사야-아모스와 대중문화의 만남(1)] 공의가 없는 사회 (1)
  7. 2009/12/03 [신명기와 대중문화의 만남(최종)] 숨으시는 하나님
  8. 2009/12/01 [신명기와 대중문화의 만남(29)] 영광의 자리에 그가 없다
  9. 2009/11/09 [신명기와 대중문화의 만남(25)] 질서 위의 은혜와 자유 (2)
  10. 2009/11/02 [신명기와 대중문화의 만남(23)] 예수 이름을 믿는 자
  11. 2009/10/30 [신명기와 대중문화의 만남(22)] 영화 '집행자'와 신명기 22장
  12. 2009/10/14 [신명기와 대중문화의 만남(17)] 돌에 맞아 죽었어야 했는데...
  13. 2009/10/12 [신명기와 대중문화의 만남(16)] 자유가 부자유가 된 이유 (2)
  14. 2009/10/06 [신명기와 대중문화의 만남(14)] 십일조와 금지 동물 (1)
  15. 2009/09/30 [신명기와 대중문화의 만남(12)] 법제정의 동기
  16. 2009/09/24 [신명기와 대중문화의 만남(9)] 내려놓는 게 예배
  17. 2009/09/17 [신명기와 대중문화의 만남(8)] 훈련도 사람 봐가면서 해야... (2)
  18. 2009/04/24 '천사와 악마'라는 영화가 나온 배경과 기독교

good cause1
good cause1 by musical photo man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여성이 안수를 받고 담임목사가 되는 것에 대해 거부감이 강한 사람들이 여전히 많습니다. 심지어 여성들조차도 여성 담임 목사에 대해 선입견이 있는 게 사실입니다. 그러면서 성경을 예로 듭니다. 구약 성경에 제사장은 모두 남성이었고 신약 성경에 사도 바울이 여성은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가르쳤다는 것을 가장 중요한 예로 듭니다.

저는 감히 말합니다. 여성이 목회자로서 안수 받는 것에 대한 거부감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문화적인 편견이 크게 작용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편견을 서포트하기 위해 성경 말씀을 잘 못 차용한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28절에는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이 말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차별이 없다는 말입니다. 전에는 이스라엘 민족만을 사랑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사실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으로 만든 모든 인간을 사랑하고 전에는 종(slave)을 허용했지만 모든 사람이 자유하며, 전에는 여자가 부족한 것처럼 느꼈는데 하나님은 남녀를 구별해서 사랑하지 않으시며 그는 모든 이를 동등하게 사랑하시는 분임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 안에는 차별하는 마음이 생겨날까요. 이는 오랫동안 내려온 문화적인 유산, 정신적인 유산 때문입니다. 백인이 흑인 노예 제도를 사용했을 때도 함의 자손들인 흑인이 노예가 됨의 정당함을 주장했다고 합니다. 이 얼토당토하지 않은 성경의 차용이 오랫동안 묵인되었고 당연시되었다는 말입니다.

또한 이스라엘인들이 자신들만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라는 선민사상과 남성만이 제사장이 되어야 하는 남성우월주의사상을 갖고 있었기에 구약에는 차별적인 언행이 자주 기록됩니다. 사사기는 바로 대표적인 예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기드온의 아들인 아비멜렉이 여성에게 맞아 죽기 전에 여성이 자신을 죽였다는 사실을 알리지 말 것을 강조했다는 내용이 사사기(Judges) 9장에 나옵니다. 여성에 대한 편견적인 발언인 것이죠. 그런데 거꾸로 생각하면 사사기를 통해 하나님이 여성에게도 힘을 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드보라가 사사와 장군이 되어 이스라엘 백성을 다스렸고 형제 70명을 죽이고 바알 신을 섬기도록 내버려둔 아비멜렉을 쳐서 죽인 자도 여성이었습니다.



옳은 일은 아니지만 사사기에 삼손을 유혹한 여성 들릴라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사사기 시대는 분명 여성에 대한 차별적인 문화가 존재했으면서도 동시에 여성이 파워를 행사한 일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던 것 같습니다.

여기서 포인트는 파워가 아니라 하나님이 구별하지 않고 남성과 여성을 고루 사용하시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자신의 편견을 놓지 않으려는 사람들은 결정적인 말을 합니다.

예수님은 남자가 아니었던가. 첫 번째 인간인 아담이 죄를 짓도록 유혹한 존재는 여자가 아니었던가.

예수님은 분명 남성이었던 것으로 보이지만(중성이라고 주장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것은 당시 유대 문화가 남성중심적인 사회였기에 선교사 활동을 위해 남성이 적당하다고 하나님이 판단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남성이 우월해서 예수님이 남성으로 오신 게 아니라 남성우월주의 사회였기에 남성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만약 유대 사회가 여성우월주의사회였다면 하나님은 예수님을 여성으로 보내셨을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에 대해서는 아담도 같은 죄를 지었기에 누가 유혹했고 누가 유혹을 당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유혹을 한 자나 유혹을 당한 자 모두 하나님을 등진 자이기에 죄인인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남자와 여자의 역할을 섞자는 것도 아닙니다. 남자가 해야 할 일, 여자가 해야 할 일은 분명히 있습니다. 남자가 아기를 낳을 수 없는 일이고 여성이 아기씨를 줄 수도 없는 일입니다.

여성이 목회자로서 안수를 받아도 됨은 그러한 근본적인 역할 분담과는 사실 연관이 덜 있습니다. 지금은 여성이 사회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시기입니다. 그러기에 여성 목회자가 필요한 것이고 여성 목회자의 안수는 성경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성 목회자 안수는 따라서 창조의 원리라기 보다는 문화적인 원리라고 하는 게 더 맞을 것입니다.




북한과 중국의 접경 지대에서 방황하는 여성들이 있다고 합니다
. 남성 목회자는 그들을 돌볼 수 없습니다. 스캔들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성 목회자는 태부족합니다. 그들은 돌봐줄 목회자가 없습니다. 그런 특별한 경우가 아니더라도 지금 목회적인 상황이 여성 목회자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성 목회자에 안수하실 것입니다. 그 안수를 기뻐하실 것입니다.

대중문화에서 여성을 폄하하고 여성은 하등 인간인 것처럼 비춰질 때가 있습니다. 여성은 남성과 다를 뿐이지 틀린 게 아닙니다. 다름과 틀림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백인과 흑인이 다르고, 아시안과 히스패닉이 다른 것처럼 여성과 남성은 다른 점이 분명 있습니다. 그러나 틀린 것은 아닙니다. 틀리다고 말하자면 사실 남자도 틀리고 여자도 틀립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다르면서도 틀린 존재들입니다. [밝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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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히노끼
    2010/01/15 16:25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문화가 고정관념이 되어서는 않되는데...하나님의 뜻을 바로 보지 못하게 합니다.

유재석 / 개그맨
출생 1972년 8월 14일
신체
팬카페 유재석 공식팬클럽 메.찾.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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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 연예인이자 국민 MC’로 불리는 유재석 씨가 얼마 전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팬들과의 만남에서 한 팬이 오랫동안 무명으로 지내다가 어떻게 그렇게 잘 풀렸냐고 질문하자 유재석 씨는 무명시절에 기도를 많이 했습니다. 한 번만 기회를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나중에 잘 되어도 내가 잘나서 잘 된 게 아니라고 생각하겠습니다라고 기도했다고 답했습니다.

유재석 씨는 종교인이 분명했습니다. 그의 기도는 하늘에 닿았던 것 같습니다. 철저한 무명 개그맨이었던 그가 이렇게 잘 나가는 이유는 그의 능력도 능력이지만 신의 섭리가 있었던 게 분명합니다.

유재석 씨는 착한 연예인, 선행을 베푸는 연예인, 동료를 세워주는 연예인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제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하나님은 셈이 굉장히 빠르신 분입니다. 빠른 정도가 아니라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시죠. 우주를 설계하셨으면 셈의 정확도와 계산 능력이 대단하실 겁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힘을 줘서 잘 되었는데 인간이 그 영광을 가로채는 것을 원치 않으신 분입니다. 하나님이 기드온에게 수만 명의 군사를 집으로 돌려보내고 300명만 남게 한 것도 인간의 노력에 의한 전쟁의 승리가 아닌 하나님이 힘주심으로 가능했음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기드온의 병사 300명은 막강한 수만 명의 미디안 군대를 무찔렀습니다.

Free Mason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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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왜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길 원하는 것일까요. 인간이 그것을 자꾸 망각하기 때문입니다. 신의 능력을 힘입어 살면 너무 좋은데 인간은 자기 스스로 살아내려는 습성이 있습니다. 아담이 그 대표주자였죠. 또한 바알과 같은 자신들이 만든 신을 섬기며 사는 못된 버릇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대표적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많은 사랑을 베풀었는데도 하나님을 저버리고 다른 신을 섬깁니다.

하나님이 기드온을 사용하려고 하자 기드온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면 왜 우리 민족에게 그런 일이 생겼습니까라고 질문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계속 다른 민족에 핍박을 받았던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은 가라, 내가 너를 지명하고 불렀다. 미디안이 너의 손에 있다고 우문현답을 하셨습니다. 답할 가치조차 없을 정도로 이스라엘의 반역 행위, 불손 행위는 심각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이미 불신앙이 있었기에 기드온은 하나님이 자신을 사용해 미디안 민족을 누르는 것에 대해 의심을 했습니다. 그는 양털 위에 이슬이 맺혀지도록 하시면 내가 하나님의 뜻을 믿겠다며 시험을 해봅니다. 신실한 하나님은 그렇게 하십니다. 기드온은 두 번째 시도를 합니다. “양털 위에만 이슬이 맺혀지지 않도록 하고 나머지에는 이슬에 맺혀지게 해달라고 시험을 합니다. 하나님은 다시 신실함을 보이십니다.



하나님은 왜 기드온이 하는 말대로 하셨을까요. 이스라엘 민족이 워낙 불신앙으로 가득했기에 그런 환경에 있던 기드온은 그런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이해를 하셨던 것입니다. 이해는 영어로 Understand인데 이를 뒤집으면 Stand under입니다. 아래서 서는 것이죠. 하나님은 기드온과 이스라엘 민족 아래에 서서 이런 사인(sign)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다시 첫 이야기로 돌아가면, 저는 유재석 씨가 국민 MC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신의 섭리가 있었다고 봅니다. 그는 무대 울렁증이 있었던 개그맨이라 무대에서는 웃기지를 못했습니다. 그런 약한 그를 들어서 우주를 창조하신 분께서 쓰셨다고 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유재석 씨가 뭔가 뛰어나니까 그렇게 됐다고 생각합니다. 구약성경 사사기 72절과 3절을 보면 그런 내용이 나옵니다.

여전사 드보라를 쓰신 창조주, 가족 내에서도 별볼일 없었던 기드온을 쓰신 창조주, 그리고 유재석 씨를 쓰신 그분이 역사를 통해 살아계시고 역사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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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
감독 잭 스나이더 (2007 / 미국)
출연 제라드 버틀러, 레나 헤디, 도미닉 웨스트, 데이빗 웬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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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Judges)를 보면 드보라(Deborah)라는 여성이 나오고 기드온이 나옵니다. 드보라는 그야말로 다재다능한 군대 지도자입니다. 강한 군사이면서도 그는 시인이기도 합니다. 아름다운 시로 수천 년 후에도 많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기드온은 하룻밤 사이에 장군이 되어 많은 사람을 놀라게 합니다. 그가 장군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습니다. 자기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의 재능과 가능성을 보시고 그를 지명했습니다.

드보라는 기원전 1000-1100년 쯤의 여성인데 당시 그가 군대의 리더가 됐다는 것은 파격적인 일입니다. 기드온도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던 장군이 되어 하나님의 용사가 됩니다. 300이라는 영화가 큰 화제를 일으킨 바 있는데 기드온은 바로 32,000명의 군대가 300명의 소수정예가 되어 전쟁터로 나가도록 한 수장입니다.



실제 영화 300 기드온을 포함한 300명의 용사들이 135천 명의 미디안군과 아말렉, 동방의 연합군을 항아리와 횃불과 나팔로 누른 전투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만든 영화입니다.

그런데 300용사의 리더가 기드온이었고 기드온은 아무도 그가 장군이 될 것으로 기대하지 않았던 인물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인간의 눈에는 리더가 되지 않을 것 같았던 사람들을 쓰시는 분입니다. 이는 그가 사람의 깊은 마음 속을 꽤뚫고 있다는 의미도 됩니다. 깊은 곳에 엄청난 잠재력이 있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보지 못하기에 어떤 이를 리더로 세우지 못하지만 반면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리더로 세우심을 성경에서 자주 보게 됩니다.

다윗은 자기 아버지로부터도 인정을 받지 못했던 아이였습니다. 사무엘이 미래의 왕이 될 사람을 찾아다닐 때 다윗의 아버지는 끝까지 다윗을 소개하지 않고 다른 형제를 소개했습니다. 그만큼 아버지의 눈에도 차지 않는 존재가 다윗이었습니다. 어리기도 했구요.  그 다윗을 하나님이 보신 것입니다.



모세는 어떻습니까? 이집트에서 왕족으로 살기는 했지만 이집트를 떠나 목자 생활을 하면서 자신은 말재주가 없고 리더십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대면해서 그를 리더로 세우셨는데 이는 하나님이 직접 리크루트한 결과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비웃었죠. 하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보고 아무도 그를 무시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과 같은 방식으로 리크루트를 하셨습니다. 그가 선택한 제자들은 세상적으로 보면 그다지 리더감이 될 수 없는 분들이었습니다.

왜 하나님은 이런 방식으로 사람을 선택할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어떤 미션이 성사됐음을 보이시기 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간이 잘나서 일이 잘됐으면 영광은 인간이 받습니다. 사람들도 그 사람이 잘나서 잘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잘 못할 것 같은 사람을 쓰셔서 어떤 미션이 잘 이뤄지게 하실 때 하나님이 비로소 영광을 받게 됩니다. 기독교 역사에서도 뛰어나고 준비된리더가 아닌 인간이 보기에는 배경이 엄청나지 않은 사람을 쓰시는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물론 그들은 깊은 내면 속에서 준비된 자들이지만 조건이나 배경을 보면 그다지 뛰어난 분들이 아닙니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이 그렇습니다
. 그는 야구 선수였고 신학적인 배경이 막강한 분이 아니었지만 하나님은 그의 신실함을 보고 쓰셨습니다. 빌 하이벨스 목사님이 그렇습니다. 그는 신학대학원을 다닌 분이 아닙니다. 그렉 로리 목사님이 그렇습니다. 그의 정식 교육은 고등학교가 전부입니다.  D.L 무디도 세상에서 요구하는 학문이 깊은 분이 아니었습니다. 고아들의 아버지 조지 뮬러도 회심 사건이 하나님이 그를 쓰시는 계기가 됐습니다.

물론 공부를 많이 하신 분들과 힘 있는 분들을 하나님은 쓰십니다. 하지만 성경과 기독교 역사를 볼 때 하나님은 약한 자를 강하게 만드셔서 사용하시는 것을 자주 보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의 묘미입니다. 공부 많이 하고, 돈이 많고, 파워가 강력한 사람을 하나님이 주로 쓰실 것 같은데, 약한 사람, 마음이 순수한 사람, 순종하는 사람을 쓰시는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요즘 한국에서는 '공부의 신'이라는 KBS-TV의 미니시리즈가 큰 인기를 얻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시쳇말로 똥통 학교에 다니는 아이 5명을 모아서 최고 명문대인 천하대학에 입학 시키는 과정을 보여주는 이 드라마는 일본 만화가 원작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5명의 아이는 이 학교에서 가능성이 있어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위권 학교에서 중하위권의 아이들인데 강 변호사라는 등장인물이 이들을 모아서 열심히 훈련하는 과정이 보여집니다.

저는 하나님이 사람을 훈련시킬 때도 대체로 이런 방식으로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헨리 나우웬은 자신이 예일대 교수일 때보다 지체장애우들과 함께 어울려서 지낼 때 하나님을 더 경험하게 된다고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이는 계급장 떼고, 재산과 명예를 내려놓을 때 하나님과 교통이 가능하다는 말과 비슷한 것 같습니다.

인간이 이런 것을 내려놓기 힘드니까, 아예 없는 자들을 들어서 쓰시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밝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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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Ehrl
    2010/01/18 04:19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아무도 인정하지 않아도 하나님만은 인정하시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2. 2010/02/28 09:15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재밋는 연결이네여

이사야서 9장에 보면 갈릴리에서 예수의 탄생을 예언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 오실 왕은 평화의 왕이요, 영원한 아버지요, 강한 하나님이요, 놀라운 멘토라는 내용이 9장에 소개됩니다.

너무나 명백한 예수 탄생의 예언 부분입니다. 예수의 탄생은 이미 기원전 750년 쯤에 예언이 됐던 것입니다. 97절에 보면 앞으로 태어난 그분은 영원한 평화와 공의와 정의를 가져올 분이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아모스서도 보면 하나님은 불의하게 돈을 버는 이스라엘 백성에 대해 화가 나 있으십니다. 가난한 자를 등쳐서 부를 챙기는 자들에 대한 화가 그들에게 미칠 것을 예언자 아모스는 말하고 있습니다.

이사야서 아모스서 그리고 신명기를 돌아보면 하나님은 분명히 공의의 하나님이요, 가난한 자를 살피시는 하나님이요, 평화를 가져오길 원하시는 하나님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이스라엘, 유다 땅 그리고 21세기를 사는 우리의 땅은 공의와 정의가 없이 자유경제주의의 이념 아래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깊어지고 노블레스 오블리쥬를 실천하는 것이 사회주의인 것처럼 여겨지는 분위기에서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모스서 521절에 나는 너희의 종교 잔치를 싫어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웃을 돌보지 않은 채 드리는 제사는 의미가 없다는 말입니다. 아모스 521-24절에 분명히 나옵니다. 너희들 노래소리, 제사 지내는 것, 헌금 다 필요 없다. 이 땅에 정의와 공의가 물처럼 흘러야 한다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 (1998 / 미국)
출연 톰 행크스, 톰 시즈모어, 에드워드 번즈, 맷 데이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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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원어에 보면 공의라는 말은 어려움에 빠진 이를 건져내는 일이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공의를 실천한다는 것은 어려움에 있는 사람을 구해내는 것입니다. 라이언 일병을 구하는 것이 비효율적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것이 바로 공의입니다. 그 한 명을 구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것이 희생됩니까. 그렇지만 구해내려는 것이 바로 공의입니다.

어려움에 빠진 인류, 어둠 속에 있는 인류를 위해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것은 비효율이지만 하나님의 공의를 실천한 일입니다. 군림하며 모든 이를 회심케 한 게 아니라 희생하며 사람들의 생명을 구해내신 것입니다.

이성주의 사회에서는 비효율은 바보짓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경 여기저기에 공의를 강조하시며 바보짓을 하길 원하십니다. 내가 좀 손해를 보더라도 어려움에 빠진 이를 건져내야 하는 것입니다.

나를 드러내기 위해 더 높이 오르려고 하고 더 많이 챙기려고 하는 게 아니라 좀 손해를 보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공의입니다.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예를 들면서 도움이 필요한 자를 그냥 지나친 자들이 효율성을 생각하기 때문에 그냥 지나쳤음을 비유로 들었습니다. 내것 챙길 것 다 챙기면서 공의를 이뤄낸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나의 희생과 손해가 있어야 공의가 실현됩니다.

하나님이 공의의 실천이 무엇인지를 보이셨고 그것은 바로 인간의 몸으로 오신 예수를 통해서입니다. 우주의 창조자가 그렇게 하실 필요가 전혀 없으셨습니다.

공의는 결국 사랑에서 출발하는 것 같습니다. 사랑하면 손해를 보게 되고 손해보면서 어려움에 빠진 자를 건져내려고 합니다. 물에 빠진 자녀가 있는데 부모가 자기 목숨을 생각하겠습니까. 사랑하기에 수영을 못해도 물속에 뛰어들게 됩니다.

장진영 / 국내배우
출생 1974년 6월 14일
신체
팬카페 장진영 공식 팬클럽 JRO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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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이 된 배우 장진영 씨의 남편이 손해를 보면서 결혼을 결심하게 된 것은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곧 죽게될 여성과 결혼한다는 것은 엄청난 희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해가 있을까봐 그는 장진영 씨의 가족과 만나 모든 재산이 가족에게 돌아가도록 조치를 취했다고 합니다.

사랑과 공의는 동의어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손해를 감수함을 의미합니다.

이사야서와 아모스서가 씌어졌던 시점은 기원전 750년부터 기원전 715년 사이인 것으로 학자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아모스가 기원전 750년 전쯤에 예언을 했고 기원전 715년까지 이사야가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상황은 북부 이스라엘과 남부 유다로 나뉘어져 있었고 이사야는 남부 유다에서 선지자로서 인정을 받는 자였고 아모스는 남부 유다에서 농부였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의 예언 또는 메시지를 듣는 사람들은 달랐습니다. 아모스는 유다 사람이었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러한 메시지를 전했고 이사야는 남부 유다에 살았고 그 지역 사람들을 향해 예언을 했습니다.

사람들은 아모스의 말은 아무래도 무시했겠죠. 오늘날도 치자면 신학교도 나오지 않은 유다 출신의 시골 농부가 갑자기 이스라엘 사람들을 향해 예언을 한다는 게 좀 우습게 보였을 수도 있습니다. 구약성서에 있는 이사야와 아모스를 읽으면서 재미난 것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맞는 말씀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의가 땅에 떨어진 유다와 이스라엘 사람들에 대한 메시지가 오늘날 우리에게 맞다는 게 신기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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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서와 아모스서가 씌어졌던 시점은 기원전 750년부터 기원전 715년 사이인 것으로 학자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아모스가 기원전 750년 전쯤에 예언을 했고 기원전 715년까지 이사야가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상황은 북부 이스라엘과 남부 유다로 나뉘어져 있었고 이사야는 남부 유다에서 선지자로서 인정을 받는 자였고 아모스는 남부 유다에서 농부였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의 예언 또는 메시지를 듣는 사람들은 달랐습니다. 아모스는 유다 사람이었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러한 메시지를 전했고 이사야는 남부 유다에 살았고 그 지역 사람들을 향해 예언을 했습니다.

사람들은 아모스의 말은 아무래도 무시했겠죠. 오늘날도 치자면 신학교도 나오지 않은 유다 출신의 시골 농부가 갑자기 이스라엘 사람들을 향해 예언을 한다는 게 좀 우습게 보였을 수도 있습니다. 구약성서에 있는 이사야와 아모스를 읽으면서 재미난 것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맞는 말씀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의가 땅에 떨어진 유다와 이스라엘 사람들에 대한 메시지가 오늘날 우리에게 맞다는 게 신기하기도 합니다. [밝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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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아모스와 대중문화의 만남(2)

부(富)하다는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대체로 부자가 되고 싶은 사람들은 자신이 갖고 싶은 것을 가질 수 있기에 부자가 되고 싶어 합니다. 부는 때로는 명예와 명성을 가져다 줍니다.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었던 혼혈아(요즘은 다문화인으로 불리죠)’ 하인스 워드가 슈퍼보울에서 MVP로 선정됐을 때 그는 부와 명예와 명성을 모두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성공하니까 세상이 다 알아줬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부를 원합니다.

이스라엘와 유다도 부를 이룬 나라였습니다. 부족함이 없는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이사야서 2장에서 유다 땅이 원하는 것을 다 가졌지만 더불어 우상도 함께 갖게 됐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28). 인간이 만든 것을 우상으로 삼는 것입니다. 이는 의미심장한 말입니다. 우상은 거의 대체로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든 것, 하나님의 작품, 하나님 자신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인간은 우상을 섬기게 되어 있습니다.

()라는 것은 바로 인간이 만든 시스템에서 얻게 되는 것입니다. 누가 더 많이 소유하게 되는지에 따라 부가 결정나는 것입니다. 부에 온 정성을 기울일 때 자동으로 따라오는 게 우상입니다. 명성이 자자해지면 교만이라는 우상이 따라옵니다. 한 유명 목사님이 강단에서 교회가 커지고 담임목사가 유명해지면 교만은 동반자처럼 붙어온다고 했는데 결코 틀린 말이 아닙니다. 유명 목회자가 쓰러지는 이유는 바로 그 교만 때문입니다. 유명 목회자의 자녀가 무너지는 이유는 바로 교만 때문입니다.

부와 명예와 명성이 우상숭배로 가는 길임을 뻔히 알면서도 우리는 왜 그 길을 원하고 하나님을 등지려고 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이 인간을 그렇게 프로그램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이 모든 일의 근원이 되지 않으면 인간이 우상숭배로 빠지게 끔 하시지 않았나 싶습니다.

수도자들이 산속 깊이 들어가는 이유는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 속에서 영적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곳에는 아주 기초적인 것만이 인간이 만든 것이고 대부분 하나님의 것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만드신 생명과 하나님이 정하신 죽음의 순간에 우리는 영성이 잠시라도 회복함을 경험하게 됩니다. 뭔가 하나님의 것이 경험되어지는 것입니다.

어쩌면 세례 요한이 빈들에서 남루한 옷을 입고 외치는 자가 됐던 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에서 영성이 되살아났기 때문일지 모릅니다.

기독교 역사를 볼 때 수도원에서 수도생활을 한 자들이 세상에 나와 엄청난 영향을 끼치는 것을 보게 되는데 이것 역시 하나님의 것을 경험한 자들의 결과물입니다.

일상 생활을 해야 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경우 수도원으로 갈 수도 없는 입장입니다. 일상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것을 발견해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습니다. 거의 모든 것이 인간이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길도 인간이 아스팔트로 깔아놓았고 자동차, TV, , 직장, 컴퓨터, 인터넷 등도 인간이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어디서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을까요.

888 =  August 8, 2008, 8-8-8, 8/8/8, 8.8.8, 08.08.08, 08082008 or 080808 - morning, Chicago Loop - HDR - flickr888 Day or flickr Day 24 hrs.
 by doug.siefken 저작자 표시

하나님을 인간이 만든 것 이상으로 높일 때만이 그런 일이 가능한 것 같습니다. (이사야 211). 어떻게 높일 수 있을까요. 먼저, 간단한 것으로 인간이 손을 댈 수 없는 하늘을 바라봅니다. 하늘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우주를 향해 있습니다. 하늘은 인간이 감히 손을 대기 어려운 공간입니다. 그저 비행기를 타고 몇 번 왔다갔다 하는 게 전부입니다. 분당우리교회의 이찬수 목사님은 미국에서 안식년을 보낼 때 하늘을 자주 봤다고 합니다.

또한 마음 속으로, 운전을 하면서, 집에 있을 때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찬양곡을 들으며 높으신 그분을 경배하는 것입니다. 비록 인간이 만든 차를 운전하면서 아스팔트 길을 가고 있지만 멀리 보이는 하늘을 잠깐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주말에는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으로 가서 그의 품에 안깁니다. 인공적인 자연보다는 자연 그대로 유지된 하나님의 자연을 보는 것입니다.

인공적으로 몸을 고치는 양방보다는 인체의 신비를 체험할 수 있는 한방을 공부하고 연구하는 것도 하나님을 우리 인간 삶의 중심에 놓는 중요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몸을 얼마나 오묘하고 절묘하게 만드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신비하게 만드신 인간을 돕는 일, 그러한 인간과 대화하는 일도 하나님을 만나는 중요한 방법 중 하나입니다. 부를 가지고 명예를 가지고 명성을 가지고 어려움에 빠진 인간을 도울 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부와 명예와 명성이 없다면 다른 방법으로 도울 수 있을 것입니다. 찾아보면 나옵니다. 적십자사에서 40년 이상 봉사한 양현승 목사님은 아침에 일어나면 주식 현황을 보는 대신 봉사 현황을 살펴보며 자신이 봉사할 거리를 찾았다고 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읽고 인간이 만든 컴퓨터와 인터넷을 통해 이 시대에 필요한 말씀을 나누고자 하는 노력은 현재 제가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입니다. 다른 환경을 주시면 다른 일을 하게 되겠죠.

The Road is llllllllong
The Road is llllllllong by ronsho ©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아스팔트의 딱딱함과 냉혹함 속에 놓여진 우리는 어찌할 바를 몰라 헤매일 때가 자주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과 같은 삶을 계속 이어가고 있습니다.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그른지를 모른 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옳은 것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요, 그른 것은 인간이 만든 것만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옳은 것과 그른 것을 계속 왔다갔다 하며 살고 있습니다. 오늘 나는 무엇을 선택하게 될까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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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12/17 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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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밀댓글 입니다

Comfort ye
Comfort ye by rogiro 저작자 표시비영리

이사야서와 아모스서가 씌어졌던 시점은 기원전 750년부터 기원전 715년 사이인 것으로 학자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아모스가 기원전 750년 전쯤에 예언을 했고 기원전 715년까지 이사야가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상황은 북부 이스라엘과 남부 유다로 나뉘어져 있었고 이사야는 남부 유다에서 선지자로서 인정을 받는 자였고 아모스는 남부 유다에서 농부였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의 예언 또는 메시지를 듣는 사람들은 달랐습니다. 아모스는 유다 사람이었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러한 메시지를 전했고 이사야는 남부 유다에 살았고 그 지역 사람들을 향해 예언을 했습니다.

사람들은 아모스의 말은 아무래도 무시했겠죠. 오늘날도 치자면 신학교도 나오지 않은 유다 출신의 시골 농부가 갑자기 이스라엘 사람들을 향해 예언을 한다는 게 좀 우습게 보였을 수도 있습니다. 구약성서에 있는 이사야와 아모스를 읽으면서 재미난 것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맞는 말씀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의가 땅에 떨어진 유다와 이스라엘 사람들에 대한 메시지가 오늘날 우리에게 맞다는 게 신기하기도 합니다. [밝은터]

이사야-아모스와 대중문화의 만남(1)

북부 이스라엘과 남부 유다는 기원전 약 750년 경에 강성한 나라를 이뤘습니다. 강성한 두 나라에 대해 농부 선지자인 아모스와 전문 선지자인 이사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합니다. 영어 성경으로 이사야서와 아모스서를 읽으면 Says the Lord라는 표현이 계속 나오는데 하나님이 이들 선지자에게 한 말씀을 그들이 대신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의 말을 신뢰한다면 하나님은 어떤 것을 원하시는 분인지 그분은 어떤 분인지에 대한 성품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가난한 자와 소외된 자를 염려하며 가난한 자들을 괴롭히는 힘을 싫어하고 선량한 사람을 마구 죽이는 자들을 혐오하는 분입니다.

재미난 사실은 두 나라는 종교적으로는 풍성한 나라입니다. 종교적인 예식이 이 두 나라를 휩쓸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은 하나님의 노여움에서 벗어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두 선지자는 이에 대한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그 노여움을 두 선지자가 대신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종교를 원하는 분이 아니라 공의를 원하는 분입니다. 은혜와 자유 속에서 질서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이사야서 115절에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너희가 기도를 아무리 해도 나는 들어주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의 하는 짓이 혐오스럽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향해 공의를 구하고, 압제된 자를 구하고, 고아를 돌보라고 하십니다. 이는 사회에서 눌린 자, 힘이 없는 자, 가난한 자를 돕지 않는 것에 대한 꾸중입니다. 인생 자체가 죄로 가득하지만 그러한 공의를 구하는 자의 죄는 눈처럼 희게 해주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아모스서에서도 하나님은 농부 선지자 아모스를 통해 유다와 이스라엘에 대해 분노하고 계십니다. 잘 먹고 잘 살고 있는 그들에게 불을 내리겠다는 메시지를 아모스를 통해 전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생각과 행동을 고치시길 원하십니다. 그게 핵심입니다. 혼내주는 게 핵심이 아니라 혼나기 전에 생각과 행동을 바꾸라는 일종의 경고인 것입니다.

우리는 대부분 혼난 후에 행동을 바꾸죠. 벌을 선 후에 행동이 수정됩니다. 그 전에 바꾸라는 경고는 어떻게 보면 사랑입니다. 내버려두는 게 아니라 계속 간섭하는 것입니다. 흑돼지를 치는 어떤 분이 있는데 그분은 흑돼지를 낮에는 방목해서 키우고 밤에는 축사로 들어오게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그분이 방목을 하면서도 저녁 시간이 되어 축사로 들어오는 어떤 음성 신호를 보내면 흑돼지들이 말을 너무 잘 듣는다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훈련을 했기에 그게 가능했다고 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하나님의 마음(말씀이 아닙니다)을 듣고 알게 된 아이들은 커서도 하나님의 심정을 헤아리는 아이가 될 가능성이 큽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스라엘과 유다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며 그것을 따르라고 훈련을 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 마음을 아는 것보다는 대중 문화에서 (심지어 교회에서) 쏟아내는 잘못된 메시지에 영향을 받고 살고 있습니다. 인터넷은 온통 연예인들 이야기이고 연예인들의 훈훈한 이야기보다는 자극적이고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내용들도 가득차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가난한 이웃을 돕고 소외된 자들을 돌보는 내용에 대해서는 칙칙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내용이 폭발적인 인기를 끄는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일요일 일요일 밤에 라는 프로그램의 '단비'는 공익에 대한 확고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놀랍고 놀라운 프로그램입니다. 김영희 PD는 아모스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말도 안 되는 내용이 인터넷, 대중문화, 언론을 뒤덮고 있습니다. 온갖 욕설과 질투와 미움이 대중문화의 주요 키워드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묵묵히 소외된 자들을 위해 일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경제적 풍요 속에서 무시당하고 있는 그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전해야 하는 교회는 자리 싸움, 교리 논쟁, 교단 편가르기에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유다처럼 종교는 있지만 하나님은 없는 것입니다. 그의 뜻은 이미 사라진 것입니다.

이사야와 아모스를 통해 전하시는 하나님 메시지는 오늘날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처럼 느껴집니다. 소위 말하는 전문 사역자들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면 하나님은 농부였던 아모스를 쓰셨던 것처럼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람들을 쓰게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도 모른채 종교 단체를 유지하기 위한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하는 일들이 줄어들어야겠습니다.

이런 가운데 위로의 말씀이 있습니다. 이사야서 12장에는 우리에게 화나나셨던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구원을 허락하신다는 내용입니다. 그는 화해자입니다. 그래서 그를 기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죄가 진홍빛 같더라도 그것을 눈처럼 희게 하시는 하나님이 우리가 지금 말하는 그 하나님입니다.

그것이 은혜요 그것이 자유입니다. 그것을 알면 구속에서 풀려나게 됩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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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Joe Yang
    2010/06/05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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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만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
    서로 위하는 마음 개울같이 넘쳐 흐르게 하여라.

    -아모스 5장 24절- (공동번역)

Tiger Woods
Tiger Woods by Keith Allison 저작자 표시동일조건 변경허락

신명기를 읽는 마지막 날입니다. 신명기 32장부터 마지막장인 34장까지 모세의 유언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모세는 노래로써, 설교로써, 자신의 백성에게 마지막 발언을 합니다.

결론은 하나님이 너희들을 사랑하고 있고 인내하며 기다리고 있다는 내용입니다. 너희들이 정신을 차리면 하나님이 너희를 사랑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그런 하나님을 보지 못한 것에 대한 책임을 리더인 모세가 지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죽게 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여전히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는 마치 예수님이 하신 것과 비슷합니다.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비슷한 일을 반복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지만 우리는 그런 고통 없이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됐습니다. 모세와 예수님은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께 쓰임 받는 방식이 비슷한 것 같습니다.

최근 어머니와 대화를 한 적이 있습니다. 어머니는 저에게 네가 39년 동안 광야생활을 했지. 40년이 되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수 있기를 기도하고 있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참으로 위로가 됐습니다. 39년 동안 하나님을 모르고 살 때도 있었고(이방인들처럼), 하나님을 배반한 적도 있었고(베드로처럼),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을 때도 있었고(광야의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내 멋대로 살려고 했을 때도 있었는데 그 하나님은 여전히 나에게 저 멀리에 있는 약속의 땅을 보여주시니 얼마나 감사한지요.

왜 약속의 땅으로 들여보내주시니 않냐고 불평할 때도 있지만 그렇게 엉망으로 살면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귀한 경험이었던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그러겠죠. 온전히 순종하지 않을 때도 있을 것이고 때로는 내 맘대로 살려고 할 때도 있을 것이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기다리셨던 것처럼 저를 기다리시리라 생각합니다. 신명기 32장과 33장은 그런 내용입니다.

내가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게 된다면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또한 저의 경우에는 나를 위해 기도하는 어머니가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신앙에 대한 책임을 졌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역사속에서 끊임없는 신에 대한 배신을 자신이 직접 책임지셨습니다. 그 혜택은 그분들이 사랑하는 백성이 입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은혜인 것입니다. 모세는 약속의 땅으로 못 들어가지만 그의 백성은 들어갈 수 있다는 그 약속은 바로 은혜인 것입니다.

하지만 그 은혜의 폭포수에서 언제까지 머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징계도 있기 때문입니다. 폭포수에 너무 오래 있으면 감기에 걸리죠. 나에 맞는 수준에서 폭포수를 벗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그 폭포수를 바라봐야 합니다. 그리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폭포수를 너무 함부로 대하면 물이 말라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징계인 것입니다. 숨으시는 하나님이 3220절에 나옵니다. 우주의 창조자가 숨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되지만 상징적으로는 폭포에 물을 떨어뜨려주지 않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골프 스타 타이거 우즈에 큰 은혜를 허락하신 하나님이지만 그 은혜와 창조주를 보지 못하면 물은 말라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리더를 모세에서 여호수아로 바꾸시는 것은 바로 숨으시는 하나님의 전형입니다. 모세는 온갖 기적과 이적을 행했고 이는 하나님의 능력에서 나왔습니다. 그런 리더가 약속의 땅으로 가지 못한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커다란 메시지를 던져주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은 기다리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숨으시면서 기다리실지, 아니면 대면하며 기다리실지는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 같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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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이 있는 이유는 하나님을 기억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내렸을 때 제1 목적은 도덕적인 이스라엘 사람을 만들게 하기 위한 게 아니라 율법을 지킬 때 자신을 기억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질서의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의미였습니다.

예수가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역시 하나님을 기억하게 하고 하나님 나라를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유대인에게 그리고 비유대인에게 자신의 존재를 다시금 알게 하고 자신이 이 세상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의미였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은 율법을 폐하러 온 게 아니고 완성시키러 왔다는 말이 바로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입니다.

모세의 나이가 120세가 되고 하나님이 약속한 땅으로 들어가지 못함을 하나님으로부터 통보받았습니다. 신명기 31장 초반부에 그런 내용이 나옵니다. 그가 죽기 전에 걱정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억해야 할 하나님을 잊고 우상을 숭배하고 우상에게 충성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신명기 31장에서 율법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강조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 하나님을 잊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21세기를 사는 우리는 하나님을 기억하게 하는 예수님을 강조하고 매주 그의 이름을 높입니다. 이유는 하나님을 기억하기 위해서입니다. 모세는 레위인들에게 7년마다 백성들에게 율법을 읽어주라고 합니다. 이유는 역시 하나님을 잊지 않도록 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신명기 31:9-13)



7일마다 (때로는 더 자주) 우리는 예배를 드립니다. 대형 교회에서 중형교회에서 소형교회에서 가정교회에서 지하교회에서 예배를 드립니다. 이유는 단 하나. 하나님을 기억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금세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매일 큐티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잊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삶 속에서 잊어버리고 잃어버리기 쉬운 하나님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그를 잊지 않아야 그가 우리 가운데 거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영화 시상식이 열렸다고 상상해 봅니다. 우리가 그 시상식에 수상 주인공을 초대해서 가운데 무대에 세워줘야 그가 수상자로 인식이 됩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시상식장 주변에서 서성 거리는 배우가 되겠죠. 그 배우는 이름이 불려져야 가운데 무대로 올라설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도 그런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주변에서 서성거리고 계십니다. 그럴 이유가 하등에도 없는데 사랑해서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의 이름을 불러드려야 그가 무대 가운데로 설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그를 기억해야 하나님은 영광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그 존재 자체로 영광스럽지만 하나님은 자녀로부터 영광됨을 칭송받길 원하십니다.

우리가 자녀에게서 아빠는 최고야! 엄마는 최고에요!”라는 말을 듣고 싶은 것처럼 말이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최고입니다. 온갖 기적을 보이시고 배고플 때는 양식을 베푸시고 적들이 있을 때는 먼저 가셔서 그 적들을 해결해주신 분이었습니다.

문제는 자녀가 아버지의 사랑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칭송은커녕 인식도 못하고 삽니다. 뛰어난 배우에게 상을 주기는커녕 그 배우가 누구더라?”라고 질문하는 자들처럼 삽니다. 배우가 눈앞에 있는데 뉘시더라?”라고 하면 그 배우가 얼마나 민망스럽겠습니까. 배우는 숨고 싶겠죠. 하나님도 백성이 인식하지 못하면 숨으십니다. 신명기 3116절 이하에 그러한 내용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숨지 않으시도록 오늘도 그의 이름을 부르며 그를 찬송해야겠습니다. 온 마음을 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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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에 나오는 율법을 보면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적용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습니다. 특히 신명기 25장의 규정은 직접적인 적용이 불가능한 것들입니다. 악인에게 40대 태형을 준다든가, 형제가 사망하면 그 아내를 다른 형제가 데리고 산다든가, 두 사람이 싸우는데 아내가 상대 사람의 음낭을 잡으면 손을 찍는다든가 하는 것은 오늘날 적용하기 어려운 규정들입니다.

그러나 이곳에 나타난 정신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질서를 지키도록 하기 위해 세밀하게 준비한 규정들을 보면서 모세가 하나님이 얼마나 세밀한 분인지 알게 됩니다. 이곳의 율법들은 모두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기 전의 이스라엘 사람들을 위한 것들입니다. 기초를 위한 초등학문과 같은 것입니다.( 3:24).

21세기를 사는 이스라엘 사람들도 여기 나오는 율법의 많은 부분을 따를 경우 무리가 생기게 됩니다. 상황에 맞게 변형하는 상황화가 필요하겠죠. 법의 정신을 아는 게 중요합니다. 초등학문 또는 기초는 세대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신학대학원에 다녔을 때 글렌 스태슨 윤리학과 교수님이 해준 말이 기억납니다. 아프리카에서 온 학생이 있었는데 어떤 분야에서 전문가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그 분야의 기초 과목을 들을 필요 없이 상위 과목을 들으면 졸업이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학교 측은 그 학생이 여전히 기초 과목을 들어야 하는 규정 때문에 규정을 따라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 교수님은 규정의 원리(principle)를 적용해야지 규정을 그대로 율법주의적(legalism)으로 적용하면 학생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했습니다.

논쟁 끝에 그 학생은 기초 과목을 듣지 않고 상위 과목을 곧바로 듣고 졸업을 할 수 있었고 자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법을 해석하는 변호사, 검사, 판사가 있는 것처럼 법은 멈춰져 있는 게 아닙니다. 상황에 맞게 제대로 해석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법이라는 것은 그 원리를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악인에게 태형 40대를 주는 것은 악한 행동에 대해 뉘우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남편이 죽은 여인을 남편의 형제가 돌보게 하는 것은 자칫 방황할 수 있는 여성을 보호하고 가족을 보호하는 법 정신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보호의 개념이 강합니다. 어떤 주석가는 가족 재산의 보호라는 말도 하더군요.

결국은 이 모든 것이 질서에 대한 것입니다. 질서는 따라서 억압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질서가 무너지면 사랑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질서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유를 경험하게 하는 질서입니다. 인간을 억압하고 인간의 자유를 빼앗는 질서가 아닙니다.

집행자
감독 최진호 (2009 / 한국)
출연 조재현, 윤계상, 박인환, 차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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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집행자로 인해 요즘 사형제도에 대한 토론이 진행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데드 맨 워킹이라는 영화에도 이러한 주제가 다뤄지고 있죠.

법은 질서를 위해 필요합니다. 그래서 죄인에게는 적절한 형벌이 내려져야 질서가 잡힙니다. 그 질서는 무고한 시민들에게 은혜와 자유를 경험하게 하고 죄를 짓는 죄인에게도 은혜와 자유를 경험하게 해야 합니다.

극악무도한 죄인은 오랫동안 감옥에서 살게 됩니다. ‘데드 맨 워킹이라는 영화에서 매튜라는 남자는 두 연인의 데이트 현장에서 강간을 하고 살인까지 한 극악한 사형수입니다. 그는 히틀러의 추종자이고 인종차별주의자입니다. 사람들은 그가 사형되어도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실제 그는 사형을 앞두고도 회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그를 헬렌 수녀는 사형될 때까지 도와줍니다.


데드 맨 워킹
감독 팀 로빈스 (1995 / 미국)
출연 숀 펜, 수잔 서랜든, 조안 글로버, 레노어 뱅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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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보면서 헬렌 수녀가 하나님의 마음을 가졌다고 생각했습니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손가락질을 했지만 헬렌 수녀는 수모를 감당하고도 매튜를 끝까지 도왔습니다. 질서를 무너뜨린 자였지만 감방에서 강제로라도 질서를 지킬 수 있는 자였기에 헬렌 수녀님은 은혜와 자유를 경험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질서에 은혜와 자유가 있으면 생명의 길로 갈 수 있지만 은혜와 자유가 없으면 그것은 사망의 길로 인도하게 됩니다.

디트로히 본회퍼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에버하르트 베트게 (복있는사람,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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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신학자들이 질서를 위해 히틀러의 정치에 토를 달지 못햇을 때 디트리히 본회퍼는 히틀러 암살을 준비했습니다. 이는 히틀러의 새 질서 위에 은혜와 자유가 없었기 때문에 내린 결론이었습니다.

신자였던 안중근은 왜 암살을 시도했을까요. 일본 제국주의의 질서 위에 은혜와 자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질서 위에 은혜와 자유가 없으면 우리는 저항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에서 은혜와 자유가 없는 질서에 대해 문제 제시를 합니다. 질서 위에 은혜와 자유가 있으면 그것은 값진 일입니다. 헬렌 수녀님은 의미있는 일을 한 분입니다.

다시 신명기에 나오는 질서를 생각하게 됩니다. 특별히 25장의 질서에 은혜와 자유가 있나 생각해 봅니다. 의인에게 은혜와 자유가 부여되고 악인에게 죄의 대가를 치르고 죄에서 빠져나오게 하는 은혜와 자유가 있습니다. 질서 밖으로 빠져나와 혼란스러울 뻔 했던 남편 잃은 여자에게 은혜와 자유가 주어지며 음낭을 잡혀 성기능을 상실할 수 있는 남자에게 은혜와 자유가 있습니다. 죄를 졌지만 손을 찍힌 여인에게는 은혜와 자유가 없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이 질서는 수정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사형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형 제도는 사형수에게는 은혜와 자유를 빼앗는 질서입니다.

아돌프 히틀러 (Adolf Hitler) / 국외정치인
출생 1889년 4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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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히틀러나 이토 히로부미의 은혜와 자유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그들도 질서 위에서 은혜와 질서를 누려야 하는 인간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너무 많은 사람의 은혜와 자유를 빼앗았던 인물들이었기에 예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그러한 엄청난 파워를 지닌 자들이었습니다.

나영이를 괴롭힌 조두순은 그래서 평생 감옥에 있어야 합니다. 그는 12년 동안 감옥에서 살고 나온 후 다른 어린이들의 은혜와 자유를 빼앗을 가능성이 큰 사람입니다. 수많은 어린이들이 잠재적인 피해자입니다. 질서(감옥) 안에서 그도 은혜와 자유를 체험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에 대한 교화작업이 이뤄져야 하고 그를 품을 헬렌 수녀님과 같은 영적 지도자가 필요하게 됩니다.

우리 사회는 가해자와 피해자를 모두에 은혜와 자유를 경험할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합니다. 그러나 가해자의 파워나 영향력이 엄청나다면 예외적으로 그들에게서 은혜와 자유를 빼앗을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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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히노끼
    2009/11/09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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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서 ,율법, 윤리등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위해 주신 것이고 그것을 잘해석하고 원리를 잘 이해한다면 조금은 덜 다치며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왜 사람을 귀히여기고 사랑하며 존중하며 아끼고 살아야 되는지 알기쉽게 분명히 말씀해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 2009/11/09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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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을 귀히 여기시려는 마음, 본받고 싶습니다...

Good Friday
Good Friday by {the twinkling of an eye} 저작자 표시비영리

구약성서 신명기에 나타난 주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입니다. 주제를 안 상태에서 읽으면 얼마나 은혜가 되는 책인지 모릅니다. 이 책을 율법책으로 읽으면 이렇게 힘든 책도 없습니다.

신명기 23장은 전체 주제를 나타내주는 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을 믿는 백성을 다른 신을 동원해서 저주하는 민족이 나옵니다. 암몬족속과 모압족속입니다. 다른 신을 동원해서 저주하는 정도면 그 민족이 얼마나 사악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 민족과 함께 지내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에게도 전염이 되어 하나님께 등돌리게 할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기에 그런 민족은 사전에 사귐을 허락하지 않는 내용이 23장에 나옵니다. 발람을 동원해서 저주하는 민족은 10세대가 지나도 하나님의 공회(assembly)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는 명령이 나옵니다.

그러한 악한 족속들과 전쟁을 한다면 병사는 몸과 마음의 깨끗함을 유지해야 함을 23장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냥 단순한 세력 싸움이 아니라 영적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실제 전쟁 상황에서도 그렇고 영적 전쟁의 상황에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에 주 앞에서 불결함을 보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한 분 중에는 굉장히 중요한 축구 경기를 앞두고는 깔끔하게 샤워를 하고 축구 경기를 관전하고 응원한다고 합니다. 축구를 단순히 축구로 보는 게 아니라 전쟁과 같이 보는 것입니다.

주 앞에 나갈 때는 정결해야 하는데 이는 그에 대한 존경의 표시요 사랑의 표시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 중의 하나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듯이 이웃을 사랑하라는 메시지를 신명기 23장은 주고 있습니다. 어떤 노예가 주인을 피해 도망을 오면 함께 거주하면서 그 노예를 압제하지 말 것을 명하고 있으며, 형제에게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지 말고, 타국인에게는 돈을 빌려줄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타국인에게는 이자는 받으라고 합니다. 그래도 타국인에게 돈을 빌려준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21세기를 사는 사람에게는 신명기 당시의 상황과 조금은 다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신지 벌써 2천년이 지난 상황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과 이웃을 사랑하는 법은 좀 더 성숙하고 넓어져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함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좀 더 넓게 세상을 품으십니다. 인간이 품을 수 없었던 존재들마저 예수님은 품으십니다. 모세가 신명기 23장에서 설교한 내용은 당시 이스라엘 민족의 연약함 때문에 그렇게 했습니다.

우리에게는 인간으로 오신 예수가 있기에 좀 더 넓게 포용할 수 있게 됩니다. 그의 이름으로 나아갈 수 있기에 악한 세력도 이겨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명기 23장에서 배제되었던 고환이 상한 자, 음경이 잘린 자, 암몬족속, 모압 족속, 밤에 몽설(몽정)하는 병사, 에돔 사람, 이집트 사람, 창녀, 남창 등을 품을 수 있습니다.

예수의 피로 모두 씻음을 받을 수 있는 자들입니다. 예수의 피가 없었다면 이들을 도저히 이겨낼 힘이 없었던 사람은 이제 예수의 보혈의 능력으로 그런 것이 가능해졌습니다.

우리 안에 역사하는 악한 영과의 전쟁을 벌일 때 예수의 이름(in the name of Jesus)”의 능력이 얼마나 강력한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나 예수의 이름에 능력을 얻는 게 아닙니다. 예수의 보혈의 능력을 진정으로 믿는 자에게 그러한 능력이 생깁니다.

마음속에 이게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냐?”고 생각하면 예수의 이름은 능력을 발휘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지난 주말 미국은 할로윈 행사가 있었습니다. 할로윈 행사가 열릴 때 악한 영의 역사가 강력하다고 합니다. 어찌보면 발람을 동원하는 모압족속과 암몬족속의 풍습을 따르는 듯합니다. 구약식으로 하면 이러한 행사에는 절대 참여하지 말고 반드시 없애야 합니다.

그러나 믿는 자에게는 예수의 능력이 있습니다. 그의 보혈이 있습니다. 믿는 자는 그 어느누구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 이름을 믿는 자, 예수 이름을 부르는 자에게는 복이 있다는 게 바로 그 뜻입니다. 사악한 영의 공격을 받을지라도 보호되는 자들이 예수 이름을 믿는 자들입니다. 그 예수를 믿는지 정말로 확인해 봐야 합니다. 그것이 기독교인으로서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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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행자
감독 최진호 (2009 / 한국)
출연 윤계상, 조재현, 박인환, 이승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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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읽을 때 문자 그대로 봐야 할 것이 있고 성경 속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봐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분별력이고 그 분별력은 성령께서 갖도록 하십니다.

신명기 22장은 혼외의 정사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룹니다. 혼외정사에 대해서는 엄격한 벌을 내리도록 하는 내용입니다. 결혼 전에 남녀가 육적인 사랑을 나눴을 경우에는 반드시 결혼을 해야 한다고 명령합니다.  신명기 22장에 따르면 순결한 상태에서 결혼하지 않을 경우 돌에 맞아야 합니다. 결혼 생활 안에서의 섹스가 아니면 대체로 돌에 맞아 죽어야 하는 상황이 신명기 22장입니다.

이 율법대로 한다면 21세기를 사는 사람 중 살아남을 사람이 몇 명 되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들키지 않을 경우 죽지는 않겠지만 말이죠. 들켰을 경우에는 돌에 맞아 죽어야 하는 사람이 굉장히 많을 것입니다. 처녀가 아닌 여자에 대해 남자가 처녀가 아니다라고 주장하고 그것이 사실로 밝혀지면 그 여자는 돌에 맞아 죽어야 합니다.

약혼한 남자와 동침하면 남자와 여자 모두 돌에 맞아 죽어야 합니다. 유부녀와 동침하면 역시 둘다 돌에 맞아 죽어야 합니다. 강간을 한 남자는 죽어야 합니다.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결혼의 신성성인 것 같습니다. 결혼생활이 그만큼 중요함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섹스는 가하되 모든 게 유익하지 않고 오직 결혼 생활 안에서의 섹스만 귀중하다는 말입니다. 물론 남자와 여자의 결혼을 의미하는 것이겠죠.

21세기 상황에서 돌에 맞아 죽어야 할 사람은 너무나 많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사역했을 때도 결혼 생활 밖에서의 섹스가 우상숭배의 문제로까지 연결됐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성생활이 문란한 여자를 사람들이 돌려치려하자 네가 죄가 없으면 그렇게 해보라고 했고 사람들은 돌을 던지지 않고 물러섰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자에게 이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하시며 보내줬습니다.

돌로 쳐서 죽이면 회개할 기회가 없고 새 삶을 살 기회를 잃게 됩니다. 윤계상, 조재현 씨가 출연하는 영화 집행자 2009 115일에 개봉된다고 하는데요 이 영화 시사회를 본 블로거들의 글을 보면 사형을 집행하는 교도관들의 이야기를 필름에 담았다고 합니다.

흉악한 범죄자였지만 20년 동안 교도관들과 친하게 지내면서 좋은 사람이 됐는데 사형을 당하는 상황에 그들은 안타까울 수밖에 없습니다.

기회는 반드시 주어져야 합니다. 흉악한 살인마가 무기징역을 받았어도 그에게 기회가 주어져야 합니다. 신명기 22장을 문자 그대로 보면 주변의 많은 사람이 죽어야 하는 상황입니다.

예수 복음은 그런게 아닙니다. 따라서 22장을 문자 그대로 보지 않고 뜻을 보는 게 중요합니다. 여기서 뜻은 결혼 생활의 신성함입니다. 결혼 생활이 깨지지 않도록 하는 하나님의 마음이 전달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과의 결합(결혼)이 깨지지 말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주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 시대에 고린도 교회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결합을 깨는 성적 문란의 분위기에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성적 문란을 바울은 경고했던 것입니다.

신명기의 저자로 여겨지는 모세도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과의 결합을 깼던(우상을 숭배했던) 민족이기에 결혼 생활을 유지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결국 하나님과의 결합을 깨지 말 것을 훈련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그것을 깨는 것은 나쁜 일이기에 돌을 던져 죽일 정도로 심각하게 다뤘던 것입니다.

결국 결혼 생활을 깨지 말고, 더 나아가 하나님에 대한 신뢰도 깨뜨리지 않는 것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살다 보면 이혼을 하는 경우도 있겠죠. 그렇다 하더라도 하나님에 대한 신뢰만큼은 깨지 말아야겠습니다.

하나님은 끝까지 기회를 주시고 신뢰 회복을 위해 인내하시는 분입니다.

The Inner Workings Of A Groom's Mind
The Inner Workings Of A Groom's Mind by Ioannis P. Skaltsas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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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indrops - S5isMacroDrops_1
Raindrops - S5isMacroDrops_1 by Daniel Y. Go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신명기 17장을 잘못 해석할 경우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모세는 17장에서 달, 태양 등을 섬기고 예배하는 자는 증인 두세 사람이 있을 경우 돌로 쳐서 죽여도 된다고 했습니다.

무속신앙을 가진 분들이 있는데 여전히 달, 태양신을 섬깁니다. 지금도 그런 분들이 전 세계에 있습니다. 그들을 돌려 쳐서 사형을 시켜야 한다는 말은 아닐 것입니다.

174절에 보면 다른 신을 섬기는 일이 이스라엘 안에서 발생하면 그렇게 하라고 나와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요.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역사를 너무나 자주 경험한 자들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여러 차례 목격했습니다.

그런 자들이 다른 신을 섬긴다면 이는 정말 배은망덕한 일이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한 개념이 확실한 민족이 다른 신을 섬긴다면 이것이야말로 커다란 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악한 행위가 바로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을 알고 있는 자들,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들이 하나님을 무시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를 포함한 많은 기독교인이 하나님을 무시하는 듯한 행동을 합니다. 돌로 맞아 죽어야 하는 죄인이 됩니다. 이때 우리에게 희망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예수입니다. 예수의 십자가 처형입니다. 우리를 대신해 죽은 것입니다. 정작 죽어야 할 자는 우리인데 그가 대신 사형을 당한 것입니다.

죽어 마땅한 우리를 위해 죽으신 은혜를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우리는 오늘도 죄를 짓습니다. 실수는 계속 이어집니다. 예수님도 이제 지칠 때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2000년 동안 얼마나 인내하시고 기다리셨습니까.

그래도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 그것이 너무나 감사합니다. 우리가 목숨이 끊길 떄까지 기다리십니다. 그의 품에 돌아오기를

인간은 잘 지내다가도 욕 한 번 하면 등을 돌립니다. 저와 아주 친한 사람이 있는데 제가 그 사람에 대해 뒷담화했다든가 앞에서 욕을 했다면 그 사람과 저는 원수가 됩니다. 반대의 경우에도 비슷한 결과가 나올 겁니다.

우리는 잘못된 일이 있을 때 얼마나 자주 하나님을 원망합니까. 얼마나 불순종합니까. 얼마나 무시합니까. 은근히 하나님을 동냥하는 분으로 치부합니다. 이런 모든 수모에도 그는 우리를 기다린다는 게 기적인 것 같습니다.

비디오 게임을 할 때 가상의 총으로 사람이나 동물을 죽이거나 사물을 파괴하는 장면이 자주 나옵니다. 게임이니까 우리는 쉽게 죽일 수 있습니다. 너무 쉽게...창조주가 사람 한 명 죽이는 것은 사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주를 만드신 이가 작은 행성의 아주 작은 한 사람을 죽이는 게 큰 문제가 되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그는 대신 총에 맞습니다. 우리가 게임을 하다가 중간에 게임 안으로 들어가서 대신 총에 맞는 것보다 더 큰 기적인 것입니다.

저는 어제 마음이 너무 힘들어 잠시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은혜를 그렇게 체험했으면서도 육의 일이 지배하니까 영의 안식이 사라졌습니다. 바로 그런 저를 인내하며 기다리시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그럴 때마다 성령을 보내시어 저를 안위하십니다.

돌에 맞아 죽어도 마땅한 나를 하나님은 인내하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없는 은혜가 감사하면서도 부담이 될 때가 있습니다. 은혜를 달라고 구하기가 죄송할 때가 있습니다 [밝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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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왕자
감독 스티브 히크너, 브렌다 챕먼, 사이몬 웰스 (1998 / 미국)
출연 산드라 블록, 랄프 파인즈, 대니 글로버, 미셸 파이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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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16장에 나오는 아빕월은 우리로 말하자면 1월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모세와 그의 무리에게는 아빕월이 의미가 있습니다. 바로 이 아빕월에 이집트에서 빠져나와 자유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아빕월에는 유월절이 있죠. 영화 이집트의 왕자에도 나오지만 아빕월의 14일인 유월절에 이스라엘 민족은 재앙에서 벗어났습니다. 또한 유월절에 이집트를 빠져 나왔고 예수님도 유월절에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했고 유월절 기간에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유월절은 항상 두 가지가 함께 합니다. 고통에 이은 자유가 함께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한 것은 고통이었지만 이집트를 나온 것은 자유였습니다. 또한 노예 생활 중에 하나님의 재앙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도 고통 중의 자유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과 그것에 따른 자유도 유월절 메시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월절이란 단어는 영어로 Passover인데 말뜻은 빗겨나간다는 것입니다. 고통 중에 있지만 결국에는 재앙의 타겟에서 빗겨나가 축복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유월절은 결국엔 자유의 메시지를 던져줍니다. 유월절을 지키는 일, 하나님께 바치는 일 등은 이스라엘 민족을 얽매이게 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자유의 메시지를 계속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고자 했던 자유의 메시지를 매번 상기하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예물을 가지고 나오라는 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축복하기 위해서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물이 필요해서 그런 게 아닙니다. (16:15) 예물을 바치면서 자유를 기억하게 하고 그들의 수고를 축복하기 위한 유월절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1611절에 보면 노예, 고아, 이방인, 남편을 잃은 자들과 함께 축하하며 기뻐하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모세가 설교할 때마다 자주 등장하는 이들이 바로 소외된 자들인데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그들도 자유를 얻게 하려는 뜻이 있는 것입니다. 묶인 자를 풀어주려는 하나님의 시도인 것입니다.

유월절 페스티발을 하면서 자유를 경험하지 못한다면 이는 엄청나게 힘든 행사에 불과할 것입니다. 예배를 하며 자유를 경험하지 못한다면 예배는 그저 부담으로 작용할 것입니다. 헌금을 하면서 부담이 되면 이는 축복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은 자유입니다. “너희는 내 안에서 자유하다!”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으십니다. 모세를 통해서, 다윗을 통해서, 예수를 통해서, 사도 바울을 통해서 하나님은 끊임없이 자유를 말씀하십니다. 모세의 율법은 이스라엘을 묶어두려는 게 아니라 자유와 축복을 주려는 것이었고, 다윗의 회개에 이은 하나님의 축복은 죄에서 자유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희생을 통해 인간에게 자유를 주려고 했고 사도 바울은 죄인 중의 괴수임에도 그 예수 안에서 자유를 경험했습니다.

우리는 자유하면 방종을 먼저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유를 말하는 게 불편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계속 자유의 메시지를 말씀하십니다. 신명기는 자유의 메시지입니다. 구약과 신약 전체는 결국엔 주 안에서 자유입니다. 이걸 보지 못하면 복음이라는 생각을 할 수 없게 됩니다. 도대체 뭐가 복음인가? 뭐가 온 인류를 위한 복된 소식인가? 그런 질문을 던져본 후에 자유를 생각해 보면 자유의 값진 의미를 알 수 있게 됩니다.

아래 내용은 미주 중앙일보 2009년 10월7일 종교8면에 소개된 밝은터의 칼럼입니다. 자유에 대한 내용입니다. 그림을 클릭하시면 원본 크기로 읽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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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히노끼
    2009/10/12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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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적인 자유, 공감가는 내용입니다.
    진정한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2. bkp
    2009/10/14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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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그 자유를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육적인 묶임이 내적인 자유를 지배하는 날이었습니다.




금지된 동물(돼지 포함)을 먹으면 안 된다. 십일조를 반드시 드려야 한다. 이러한 내용이 신명기 14장에 나옵니다. 이런 것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입지나 입장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는 홀로 존재하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스라엘 백성을 훈련하길 원합니다.

이러한 명령을 내린 것은 특별히 그들을 훈련하기 위해 그런 것입니다. 어떤 구약학자는 이 성경 말씀에 근거해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하는데 꼭 그럴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십계명을 내리고 이런저런 계명을 주는 것은 훈련을 위한 것입니다. 태릉선수촌에 들어가면 선수들은 이런저런 제약을 받습니다. 먹는 것, 자는 것, 훈련하는 것 등을 코칭스태프가 짜준 계획대로 따라야 합니다.

선수촌에 들어가면 선수들은 평소에 먹었던 것을 못 먹게 됩니다. 선수촌에 나오면 먹을 수 있겠죠. 대회가 끝나면 원하는 것을 먹습니다.

14장에 나오는 십일조도 같은 개념인 것 같습니다. 내가 번 것을 혼자 다 갖는 것보다 나누는 훈련을 하나님은 시키시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십일조가 필요한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주의 창조자이신데 십일조가 왜 필요하시겠습니까.  그의 백성에게 나눔을 훈련토록 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훈련 계획을 짜셨는데 이를 거부하면 불순종인 것입니다. 태릉선수촌에 들어간 선수가 코치진이 만든 훈련 계획을 거부하면 훈련자는 당황하게 됩니다.

그 훈련이 코치를 위한 훈련은 분명히 아닙니다. 선수를 위한 훈련입니다. 선수가 최고의 경지에 오르도록 하는 훈련입니다.

금지된 동물과 십일조는 이스라엘 백성을 훈련시키기 위한 훈련 내용이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십일조라는 정형화된 헌금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십일조는 십의 일을 의미합니다. 십의 일은 10%입니다. 민족에 따라 5%가 될 수 있고 사람에 따라 20%, 30%가 될 수도 있습니다. 십일조를 하면 기독교인으로서 할 일을 다했다는 분위기를 심는 것은 두 가지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첫째, 십일조를 도저히 못하는 사람에게는 자괴감이, 둘째 십일조 이상을 할 수 있는 사람에겐 자만감과 함께 안도의 마음이 생길 수 있습니다. 20%-90%를 헌금할 수 있는 능력의 사람인데 10%에 만족합니다.로널드 사이더라는 풀뿌리 운동가이자 목사는 누진 헌금이라고 해서 수입이 높을수록 많은 헌금을 내고 거액의 수입을 올리는 사람은 최고 90%까지 헌금을 하도록 하는 운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그 헌금은 전 세계 가난한 자들과 나누자는 것입니다.

사이더의 운동은 학계에서는 공감대를 형성했지만 교회의 큰 호응을 얻지는 못했습니다. 릭 워렌 목사와 같은 이가 사이더의 영향을 받아 삶 속에서 실천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십일조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맞는 훈련 방법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 상황에서 그 숫자가 훈련하기에 좋다고 보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십일조를 갖고 어려운 이웃을 도울 것을 명령했습니다. 신명기 14장 끝 부분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십일조만 강조하고 그 쓰임에 대해서는 나 몰라라하는 것은 굉장한 오류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많은 교회가 십일조와 헌금을 갖고 교회 시스템 유지에 주로 사용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어려운 이웃을 돌보는 일에 게으른 것 같습니다.

성경의 필요한 부분만 갖다가 교회 시스템 유지를 하려고 하고 정작 교회가 해야 할 의무를 다하지 못하고 있는 점은 이 시대의 기독교가 각성해야 할 부분인 것 같습니다. 저 역시 그러한 현실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최근 들어서는 각성의 분위기가 일고 있어 그나마 감사한 일이지만 여전히 기존의 시스템의 높은 벽으로 인해 개혁이 이뤄지기 어려운 게 사실입니다. 교회에 대한 불신이 점점 더 커지고 있고 수많은 정보를 접할 수 있는 젊은이들은 교회에 조소를 보내는 게 오늘날의 현실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읽는 교회가 많이 나타나면 세상도 비웃지 못할 것입니다. 감자탕 교회와 같은 교회가 한국 교회의 대세가 되게 하소서.

당신들은 매 삼 년 끝에 그 해에 난 소출의 십일조를 다 모아서 성 안에서 저장하여 두었다가, 당신들이 사는 성 안에 유산도 없고 차지할 몫도 없는 레위 사람들이나 떠돌이나 고아나 과부들이 와서 배불리 먹게 하십시오. 그러면 주 당신들의 하나님은 당신들이 경영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신명기 142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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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히노끼
    2009/10/06 17:11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속이 시원해 집니다. 알아들을 수 있는 좋은 글을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Barack Obama at Las Vegas Presidential Forum
Barack Obama at Las Vegas Presidential Forum by Center for American Progress Action Fund 저작자 표시변경 금지

신명기 10:13, 11:8, 11:19-21, 12:28을 보면 계명을 지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것이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계명은 하나님을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니라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한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의무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지킵니다. 유대인 랍비들은 지금도 이 계명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씁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계명은 그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자손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계명을 지키면 하나님이 기뻐한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의무와 마음의 차이가 있습니다.

이것을 지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지는 않습니다
. 이는 의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계명을 주실 때의 부모의 마음을 자식이 알고 감사하게 이를 따르려고 한다면 이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이는 마음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똑같습니다. 계명을 지키는 것이 똑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반응은 크게 다릅니다. 계명을 지키는 자의 마음을 보고 기뻐하시고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사실 계명은 인류 역사를 통해 이곳저곳에서 다른 종교나 도덕법으로 지켜졌습니다. 열심히 지킨 민족을 하나님이 사랑한 게 아니라 그 마음의 동기를 알고 섬긴 민족을 사랑하셨습니다. 물론 온인류를 사랑하셔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이지만 특별히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 뜻을 마음 속에서 떠나지 않게 하는 민족은 특별히 더 사랑하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미국에서는 지금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의료보험 개혁을 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법제정을 해야 하는데 그의 의도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정말로 가난하고 보험이 없는 사람들을 위한 법제도인지 자신의 정치적인 야망을 이어가기 위한 제도인지를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전자이면 당연히 그의 개혁 시도를 지지해야 하는 것이고 후자이면 반대해야 합니다. 전자이면 사랑에서 나온 것이고 후자이면 욕심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위해 계명을 만들었다면 이는 너무 많은 사람을 얽매이게 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인간을 위해 계명을 만들었다면 이는 사랑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계명을 지키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느껴지니까 순종하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계명을 지키라는 것은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지키려고 하는 것은 위대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순종은 제사보다 나은 위대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의무로 하는 순종은 남는 게 인간의 영광이지만 사랑으로 하는 순종은 남는 게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 대한 사랑과 우리가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계명을 주셨다는 점입니다.

계명을 만든 이가, 법을 제정한 이가 어떠한 의도로 규례를 적용하려고 했는지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는 우리가 사랑의 순종을 하는지, 의무적인 순종을 하는지를 결정하는 중요한 출발점이 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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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성서 신명기(Deuteronomy) 큐티를 하면서 대중문화와 삶의 이야기를 나누는 코너입니다. 여러분의 의견, 조언, 코멘트 등을 주시면 더욱 좋을 것 같습니다. 그 아홉 번째 시간입니다.


하나님이 복을 준다는 것은 우리가 행위를 잘할 때 주는 게 아닙니다. 성경에 나온 인물을 보면 행위로 복을 받은 자는 없습니다. 행위로는 부족하지만 하나님께 진정으로 엎드린 자, 낮아진 자, 하나님 아니면 안 된다고 외치는 자에게 하나님은 약속을 하고 그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 약속의 땅을 허락한 이유는 그들이 정의롭기 때문이 아닙니다. (신명기 96). 하나님이 우리에게 예배하게 하고 많은 일들을 하게 하고 먹고 살 수 있게 하는 것은 우리가 의롭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의롭고 정직하기 때문에 복을 준다는 것은 복음의 핵심에 어긋나는 표현입니다. 신명기 9장은 온통 그 내용으로 가득합니다. 너네가 의롭지 않지만 내가 약속을 이행한다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진 내용으로 가득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할 만큼 했는데도 그들은 하나님께 반역합니다. 그런데 약속의 땅을 주시겠다고 하는 것은 순전히 그의 은혜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저렇게 하면 하나님은 여러분을 의롭게 여겨 여러분에게 큰 복을 내리실 겁니다.”

이런 말을 듣는다면 그 하나님은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인간사에서 의로운 사람은 한 명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나는 곤고한 자라고 고백할 정도로 의로운 자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행위로 의롭게 될 수 없음을 깨닫는 순간, 하나님께 완전히 손들고 나아가는 순간, 우리는 의롭다는 칭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아무렇게나 살자는 게 아니라 나 졌어요. 내 뜻대로 사는 게 아니군요라고 할 때 의로움으로 갈 수 있는 것입니다.

Indian Muslims Gather To Celebrate Eid ul-Fitr

모슬렘 교도들이 최근 워싱턴 DC에서 15시간 연속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면 인간이 의로워질 수 있을까요? 라마단 기간에 거룩하게 살면 의로워질까요?

종교 의식으로 보면 기독교가 이슬람교를 쫓어가기 어려울 것입니다. 신실한 무슬림은 하루에 세 번 예배를 드립니다. 기독교인 중에 하루 세 번 예배를 드리는 이는 많지 않습니다.

종교 의식이 중요한 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난 어쩔 수 없는 죄인이고 나는 예수님이 필요한 연약한 존재임을 인정하는 게 진정한 예배의 시작입니다. 그 마음을 유지하는 자는 종일 예배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수백 번의 제사보다 한 번의 겸손한 마음, 낮은 마음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그게 바로 복입니다. 그런 마음을 갖는 자가 복있는 사람입니다. 시편 1편을 읽어보시면 복있는 자가 어떤 자인지 나옵니다. 버릇처럼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하는 게 아니라 심중에서 나오는 '나는 무기력하니 당신께서를 나를 책임지소서' 하는 마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내 마음이 교만함과 의로움으로 가득하면 매일 예배드려도 소용이 없습니다. 오히려 많은 예배 횟수는 그 사람을 더욱 교만케 합니다. 자기 의로 구원을 받으려고 합니다. 무슬림과 유대교 분들은 자기 의로 구원을 완성하고자 합니다. 기독교는 자기 의로 구원이 될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게 복음의 핵심입니다. 

복있는 사람은 교만한 자에 서지 않는 사람입니다.

더 낮아져야 하겠습니다.

더 깨져야 하겠습니다.

그러기에 주님이 사랑하시는 자는 가난할 수 있고, 건강하지 않을 수 있고, 미련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부유하고
, 건강하고, 너무 똑똑하면 자기도 모르게 높은 자리에 자신을 올려 놓습니다. 자기숭배, 우상숭배자가 될 수 있습니다.

Jordan Bulls8
Jordan Bulls8 by Vedia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농구 선수 마이클 조던은 위대한 선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주신 뛰어난 능력을 가진 선수였습니다. 아쉬웠던 점은 그는 자기숭배가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동료와 어려운 일이 많았습니다. 자기가 혼자 승리를 이끌어야겠다는 마음이 강했습니다. 하지만 자신을 조금씩 내려놓으면서 그의 소속팀인 시카고 불스는 강한 팀이 됐습니다. 조던이 자신을 조금 더 내려놓을 때마다 불스는 강해집니다. 이처럼 우리도 우리가 할 수 있다는 마음을 현재 상태에서 조금 더 내려놓는다면 하나님이 일하실 공간이 확보됩니다. 팀 워크가 활동될 수 있는 것입니다. 좀 더 나아가 우리는 주 앞에 더 많이 우리를 내려놓을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 앞에 내 영혼은 바짝 엎드릴 때 비로소 주님을 예배할 준비가 되어 있게 됩니다. 종교 의식을 백 번 천 번해도 내 영혼이 낮아져 있지 않으면 그 의식은 그야말로 의식으로 끝나게 됩니다.

부유함도 주님이 주신 것, 건강도 주님이 주신 것, 지혜도 주님이 주신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진정으로 복된 사람입니다. 가난함도 주님이 허락하신 것, 질병도 주님이 허락하신 것, 미련함도 주님 주신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진정으로 복된 사람입니다.

신명기 9장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은 그런 의미에서 복된 사람들입니다. 여전히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못난 자식도 부모는 사랑합니다. 포기하면 부모와 자식 관계는 끝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포기하면 회복할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포기하고 있지 않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를 통해 우리를 포기하지 않았음을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그것만으로도 위로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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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가 아이들을 훈육할 때 어떤 방법을 사용합니까
? 불편하게 만드는 겁니다. 아이가 불편을 느껴야 훈육이 시작됩니다.

아이가 편한 상태에서는 절대 훈육이 되질 않습니다
. 어른도 마찬가지입니다. 편안하면 성장이 안 됩니다. 약간은 불편해야 합니다.

농구 스타 마이클 조던은 최고의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많은 사람의 도전적인 발언을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그래야 자신을 훈련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모두가 최고라고 칭찬할 때 그런 도전이 없으면 나태해질 수밖에 없죠.

갑자기 유명해진 연예인들을 보면 더 열심히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태해져서 이전만큼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조던에게 도전적인 발언을 했던 사람은 그의 코치 텍스 윈터였습니다
. 조던은 나는 단 한 번도 윈터를 만족하게한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윈터는 세계 최고의 농구 선수 조던의 부족한 부분을 항상 지적하곤 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또 자녀를 쥐잡듯 잡으려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아이는 최고의 수준에 와 있지도 않고 아직은 약한 존재입니다. 또 자녀가 그것을 원하는 게 아니면 함부로 아이들을 잡으면 안 됩니다.

직장 상사가 이 내용을 읽고 부하들을 잡으려고 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만약 부하가 만족스러운 대우를 받고 있고 직장의 분위기가 성장에 목숨을 건 분위기라면 괜찮지만 섣부르게 그렇게 했다가는 팀워크를 망치게 됩니다.

그러한 강력한 훈련 및 훈계는 어느 정도 레벨에 오른 사람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바로 민족 중에서 마이클 조던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미 이집트에서 얼마나 많은 훈련을 받았습니까. 고통을 치르며 이집트에 있었고 모세를 따라 이집트를 나와 광야생활을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윈터 코치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훈련받은 민족이기에 십계명을 내려 그들을 훈련하려고 했습니다. 신명기 85절과 6절에 그런 내용이 나옵니다.

이 십계명을 아프리카 오지에 가져가 이대로 지켜라고 한다면 어떻겠습니까? 이는 윈터 코치가 이제 막 농구를 배우기 시작한 제 조카 진우(7)에게 지적질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가 됩니다.

저는 윈터 코치와 개인적으로 대화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윈터 코치는 참 부드러운 사람이었습니다. 하승진 선수에 대해 이야기를 해달라고 하자 친절하게 말을 해줬습니다. 하지만 그는 조던에게는 엄격한 선생이었습니다.

계명이라는 것은 규칙이라는 것은 사람을 봐가면서 내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룹의 성숙도에 맞게 내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최근에 블로그 관련 강좌를 하나 열어서 두 달 동안 했는데 최신 정보를 모두 알려드리며 열심히 했지만 배우는 분들이 컴퓨터에 익숙지 않아서 제가 했던 내용의
10%도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 같다는 결론을 냈습니다. 아무리 좋은 내용도 받아들이는 분의 상황에 맞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십계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창녀촌에서 사역했던 최일도 목사님이 십계명을 강조해서는 되겠습니까? 성경에는 하나님의 위로와 은혜의 내용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들의 상황을 봐가며 훈련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최일도 / 목사,시인
출생 1957년 9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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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을 하는 자의 수준이 아니라 훈련을 받는 자의 수준에 맞춰야 한다는 교훈을 얻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런 의미에서 수준 있는 훈련받는 자였습니다.

하지만 그들도 불만이 가득했습니다
. 훈련이 너무 고되고 길었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혼나면서 참아내면서 약속의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랬기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에서 예수 탄생을 결정하시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고된 훈련에 대한 선물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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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9/19 07:00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이스라엘 민족 수준의 우수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이 아닐까요
    그리고 또 모세의 지도자로서의 자질의 우수성으로 저는 생각합니다.

    오늘날 이스라엘 민족이 우리인데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없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나설 수 있겠습니까. 성경에 보면 항상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 나라보다는 빵을 구했고 하나님의 의보다는 자기들의 명분이 앞섰었습니다.
    또 모세는 예수 그리스도의 전형이라 볼 수 있습니다.
    • 2009/09/21 17:42
      댓글 주소 수정/삭제
      하나님의 긍휼이 그들의 우수성과 연관이 있는 것 같습니다. 긍휼을 베푸셔서...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성경: 로마서 9

율법이 강조되는 사회

율법이 강조되면 사회가 건강해지고 룰을 잘 지킬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정반대입니다. 인간이 율법을 강조하기 시작하면 하나님은 그 사회에서 떠나게 됩니다. 왜냐하면 율법이 주인 노릇을 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필요 없기 때문입니다. 아이러니죠.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인데 정작 율법만 주인노릇하고 하나님은 없다니 말이죠. 사람이 자신의 의로 하나님께 이르려고 하니 더욱 힘들어집니다. 결국 하나님은 가만히 계시고 인간이 하나님께 이르려고 하는 것에서 한계성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한국은 율법을 강조하는 나라인 것 같습니다. 유교의 영향도 있고 기독교가 들어가서 율법을 많이 강조하면서 유교와 기독교가 합세(?)해 율법을 더욱 강화했습니다. 긍정적인 면도 물론 있지만 대체로 결과는 부정적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율법이 강조되면 하나님이 가만히 계시게 되고 그러면 인간의 능력으로는 율법으로 하나님께 이를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율법에 의해 의에 이르는 자

사도 바울이 로마서 9장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게 바로 이것입니다. 율법을 통해 의에 이르고자 하는 자는 걸림돌에 걸려 넘어진다고 지적합니다. 율법으로 의에 이르는 것은 내가 뭔가를 해서 하나님께 의로운 자라는 칭송을 받기 원하는 것입니다. 9장 후반부에 그런 내용이 나옵니다.

이 내용은 이스라엘 독자들에게 쓴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평생을 율법에 의지하여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이 율법을 잘 지켰기 때문에 세상을 지배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상을 지배한 것은 맞는 말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예수를 부인했습니다. 예수를 부인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부인한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자비와 은혜를 내려주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율법을 잘 지킨 사람만을 칭찬하는 하나님입니다. 그렇기에 율법을 지키지 않는 비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924절에 하나님은 비유대인들의 하나님이기도 하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믿는 것

사도 바울은 로마서 내내 하나님의 성품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는 것은 사실 마이너이고 정말 중요한 메이저는 하나님의 성품을 알아야 하고 그를 인정해야 하고 그가 꾸준히 참으시고 너그럽다는 것을 알고 믿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대화를 하면 항상 나오는 말. “그래도 율법은 중요하다. 계율을 지켜야 한다.” 맞습니다. 틀린 말이 결코 아닙니다. 질서를 위해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지키는 것으로 구원을 얻었다고 할 수 없다는 게 사도 바울 말의 핵심입니다. 계율을 지키고 룰을 지키고 질서를 지키는 것은 인간이 이 세상에서 기본적으로 해야 할 일들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믿음으로 몰고가는 경향이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잘 지키면 믿음이 있다 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믿음은 믿음으로 설명해야

믿음은 믿음으로밖에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믿음은 행위와 이론으로 가능한 게 아닙니다. 믿음은 믿음입니다. 제가 누군가에게 나는 너를 믿는다고 하면 그 믿음은 이론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라 체험과 관계를 통해 만들어지게 됩니다. 인간이 연약하기에 설명을 하고 율법도 만들어 시험도 하고 하지만 사실 믿음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도 해야 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믿음은 제한되게나마 설명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천사와 악마
감독 론 하워드 (2009 / 미국)
출연 톰 행크스, 이완 맥그리거, 아옐렛 지러, 스텔란 스카스가드
상세보기

영화
천사와 악마

천사와 악마라는 영화가 개봉됩니다. ‘종교와 과학의 대결이라는 전체 그림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비밀결사대와 교황청의 갈등을 소재로 하고 있습니다. 교황청이 진실을 숨기고 있다는 내용의 영화입니다. 교회는 역사를 통해 너무 많은 틀을 만들었습니다. 너무 많은 율법을 만들었습니다. 성경을 근거로 그렇게 했다고 했습니다. 성경을 문자적으로만 봤기 때문에 그러한 결과가 나왔던 것입니다. 문자 안에 담긴 비밀, 문자 안에 있는 뜻, 문자 안에 있는 믿음을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것을 본 사람들은 이단으로 몰렸습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뜻을 잘못 이해하고 가르쳤을 때 반드시 적대적인 그룹이 생겨났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잘못 알려줬을 때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천사와 악마는 그런 내용이라고 합니다. 물론 모든 게 교회의 잘못은 아닙니다. 어둠의 영이 강력히 역사한 결과이기도 합니다. 확실한 것 하나는 자비하신 하나님, 은혜로운 하나님, 참으시는 하나님을 전하지 못한 것은 기독교의 실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인들을 컨트롤하기 위해 너무 율법으로 묶어둔 것이 실책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일 하심을 우리가 너무 제한했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희망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궁금점과 인생의 의문점을 해결해주셨기 떄문입니다. '오직 예수'라는 말. 그 말이 왜 맞는지 알 수 있습니다. 논쟁 속에서도 여전히 '오직 예수'가 우리의 질문에 답을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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