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
감독 이창동 (2007 / 한국)
출연 송강호, 전도연, 조영진, 김영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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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117절부터 34절까지는 오늘날 미국과 한국의 기독교를 제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썼던 편지 글이 오늘날 상황에 어쩌면 그렇게 잘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현재 고린도 교회는 예수를 기념하는 성만찬을 하면서 분열과 분파로 가득하고 가난한 자를 돌보지 않고 이웃과 협력을 하지 않는 문제의 그리스도인들의 집합소입니다.

오늘날 교회를 봅니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비슷한데, 성만찬은 매주 또는 한 달에 한 번 하면서 교회가 얼마나 분열과 분파로 가득한지 교회 밖의 분들도 알 수 있을 정도입니다. 가난한 자를 돌보지 않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처럼 되어 있고, 이웃들과 협력하지 않는 집단으로 악명이 높습니다. 너무나 많은 교리, 교회법, 논리들이 기독교의 세상과의 협력을 막고 있습니다.

그런데 매주 예배를 드리고 매주 또는 매달 성찬식을 합니다. 이웃과 평화를 유지하지 못하면서 떡을 떼고 잔을 마시는 게 무슨 소용이 있냐는게 사도 바울의 오늘 메시지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개독교라고 해서 엄청난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안티 기독교 세력이 얼마나 많은지요. 솔직히 어떤 부분에서는 그들의 활동이 이해가 될 때도 있습니다. 제 자신을 포함해서 하는 짓이 가관입니다. 내가 나를 봐도 기독교에 믿음이 가질 않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이런 비난의 화살이 우리에게는 약이 될 수 있습니다. 계속 지적을 받다보면 잘못을 알게 되고 조금씩 고쳐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이 지적을 하는 것은 그만큼 기대가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통해 우리를 징계하고 계신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겸허한 마음으로 그들의 지적을 받아들이며 개선하고 개혁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 1132절은 위로가 되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징계는 우리가 더 잘될 수 있도록 하는 징계입니다. 비평이 있어야 좋은 작품이 나오듯, 강한 비난을 통해 기독교가 좀 더 견고한 종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동안은 너무나 성장 위주의 기독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앞뒤옆 돌아볼 여유도 없었습니다. 이제는 속력을 줄이고 견고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33절의 내용처럼 형제를 기다려줘야겠습니다. 분쟁도 줄여야겠습니다. 파당도 없애야겠습니다. 판단 받는 모임이 되지 않도록 해야겠습니다.

그럴 때에 예수님의 살과 피를 기념하는 성찬식이 진정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 주일에 드리는 예배에 감격이 있고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야 우리는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할 수”(11:26) 있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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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d Friday
Good Friday by {the twinkling of an eye} 저작자 표시비영리

구약성서 신명기에 나타난 주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입니다. 주제를 안 상태에서 읽으면 얼마나 은혜가 되는 책인지 모릅니다. 이 책을 율법책으로 읽으면 이렇게 힘든 책도 없습니다.

신명기 23장은 전체 주제를 나타내주는 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을 믿는 백성을 다른 신을 동원해서 저주하는 민족이 나옵니다. 암몬족속과 모압족속입니다. 다른 신을 동원해서 저주하는 정도면 그 민족이 얼마나 사악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 민족과 함께 지내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에게도 전염이 되어 하나님께 등돌리게 할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기에 그런 민족은 사전에 사귐을 허락하지 않는 내용이 23장에 나옵니다. 발람을 동원해서 저주하는 민족은 10세대가 지나도 하나님의 공회(assembly)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는 명령이 나옵니다.

그러한 악한 족속들과 전쟁을 한다면 병사는 몸과 마음의 깨끗함을 유지해야 함을 23장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냥 단순한 세력 싸움이 아니라 영적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실제 전쟁 상황에서도 그렇고 영적 전쟁의 상황에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에 주 앞에서 불결함을 보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한 분 중에는 굉장히 중요한 축구 경기를 앞두고는 깔끔하게 샤워를 하고 축구 경기를 관전하고 응원한다고 합니다. 축구를 단순히 축구로 보는 게 아니라 전쟁과 같이 보는 것입니다.

주 앞에 나갈 때는 정결해야 하는데 이는 그에 대한 존경의 표시요 사랑의 표시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 중의 하나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듯이 이웃을 사랑하라는 메시지를 신명기 23장은 주고 있습니다. 어떤 노예가 주인을 피해 도망을 오면 함께 거주하면서 그 노예를 압제하지 말 것을 명하고 있으며, 형제에게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지 말고, 타국인에게는 돈을 빌려줄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타국인에게는 이자는 받으라고 합니다. 그래도 타국인에게 돈을 빌려준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21세기를 사는 사람에게는 신명기 당시의 상황과 조금은 다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신지 벌써 2천년이 지난 상황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과 이웃을 사랑하는 법은 좀 더 성숙하고 넓어져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함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좀 더 넓게 세상을 품으십니다. 인간이 품을 수 없었던 존재들마저 예수님은 품으십니다. 모세가 신명기 23장에서 설교한 내용은 당시 이스라엘 민족의 연약함 때문에 그렇게 했습니다.

우리에게는 인간으로 오신 예수가 있기에 좀 더 넓게 포용할 수 있게 됩니다. 그의 이름으로 나아갈 수 있기에 악한 세력도 이겨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명기 23장에서 배제되었던 고환이 상한 자, 음경이 잘린 자, 암몬족속, 모압 족속, 밤에 몽설(몽정)하는 병사, 에돔 사람, 이집트 사람, 창녀, 남창 등을 품을 수 있습니다.

예수의 피로 모두 씻음을 받을 수 있는 자들입니다. 예수의 피가 없었다면 이들을 도저히 이겨낼 힘이 없었던 사람은 이제 예수의 보혈의 능력으로 그런 것이 가능해졌습니다.

우리 안에 역사하는 악한 영과의 전쟁을 벌일 때 예수의 이름(in the name of Jesus)”의 능력이 얼마나 강력한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나 예수의 이름에 능력을 얻는 게 아닙니다. 예수의 보혈의 능력을 진정으로 믿는 자에게 그러한 능력이 생깁니다.

마음속에 이게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냐?”고 생각하면 예수의 이름은 능력을 발휘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지난 주말 미국은 할로윈 행사가 있었습니다. 할로윈 행사가 열릴 때 악한 영의 역사가 강력하다고 합니다. 어찌보면 발람을 동원하는 모압족속과 암몬족속의 풍습을 따르는 듯합니다. 구약식으로 하면 이러한 행사에는 절대 참여하지 말고 반드시 없애야 합니다.

그러나 믿는 자에게는 예수의 능력이 있습니다. 그의 보혈이 있습니다. 믿는 자는 그 어느누구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 이름을 믿는 자, 예수 이름을 부르는 자에게는 복이 있다는 게 바로 그 뜻입니다. 사악한 영의 공격을 받을지라도 보호되는 자들이 예수 이름을 믿는 자들입니다. 그 예수를 믿는지 정말로 확인해 봐야 합니다. 그것이 기독교인으로서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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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oices
Choices by abcdz2000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옛 선원들은 해도를 제작하면서 두려움을 고스란히 드러냈습니다. 아직 가보지 못한 광활한 바다를 그리고 그 위에다 ‘이무기의 보금자리’, ‘악마의 집’, ‘귀신의 소굴’ 같은 지명을 적어 넣었습니다. 저마다 내면의 지도를 그린다면 곳곳에 비슷한 이름들을 붙이지 않았을까요? 부대끼고 싸우는 바다는 ‘이무기의 보금자리’라고 부릅니다. 따뜻한 기운이 사라진 바다에는 ‘악마의 집’이라는 문패를 답니다. 죽음과 영원한 세계가 시작되는 지점에는 ‘귀신의 소굴’이라고 표시해 둡니다. 여러분의 지도는 어떻습니까?

아직도 무시무시한 지명들이 즐비하다면, 헨리 5세 시대의 유명한 선장 존 프랭클린 경을 보고 용기를 내십시오. 당대의 탐험가들이라면 누구나 그랬겠지만 그에게도 대양은 수수께끼로 가득 찬 세계였습니다. 하지만 동료들과 달리 존 프랭클린 경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해도를 새로 손에 넣으면 ‘이무기의 보금자리’, ‘악마의 집’, ‘귀신의 소굴’ 따위의 지명을 지워 버리고 거기다가 ‘하나님이 계신 곳’이라는 이름을 써 놓은 겁니다.

자신의 지도를 돌아보고 같은 표시를 해두십시오. 하나님이 존재하시지 않는 곳은 없습니다. 이사를 가든, 군에 입대를 하든, 승진을 하든, 퇴직을 하든, 입원을 하든 절대로 주님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는 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

「일용할 양식」/ 맥스 루케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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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세상의 눈으로는 값싼 일을 하셨지만 하나님 눈에는 가장 값진 일을 하셨다. 세상이 조롱하고 있지만 값진 일을 하고 있는 분들이 있다. 아내도 가족도 친척도 친구들도 세상이 모두 비웃고 무시할 수도 있을 정도로 능욕스럽지만 그분들은 하나님 앞에서는 칭찬 받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밝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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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jab
Hijab by markb120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바울이 태어났던 다소에서는 여인들이 수건을 머리에 덮는 것을 예의 범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고린도에 있던 그리스도인 여인들은 헬라 여인들처럼 예배할 때 자신들의 머리를 가리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한 논란이 고린도 교회에 일었던 것 같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 바울의 답변이 고린도 전서 11장에 나옵니다. 머리에 수건을 두르는 게 굉장한 이슈였던 것 같습니다. 이는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 술과 담배를 하는 게 굉장한 이슈인 것과 비슷한 듯합니다. 이에 대한 주석을 살펴보았는데,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머리에 수건을 두르는 것을 복종의 의미로 해석하거나 남성의 우월성에 대한 이야기로 해석하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이슬람 문화에서는 여성이 머리를 가리는 것이 전통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 내용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 고민이 됐습니다. 고린도전서 11장을 읽고 또 읽어도 주석가들의 해석이 마음에 와 닿지 않았습니다. 고린도 전서 10장까지 바울의 편지 내용을 보면 엄격한 율법이나 법칙주의자가 아닌 것을 봤기에 머리에 수건을 두르는 것을 엄격한 법으로 규정하는 듯한 어조는 아닌 것 같았습니다.

1111절에 바울이 표현했던 것처럼 남자와 여자는 서로 의존관계이지 종속관계나 독립관계가 아닌 것을 볼 때도 남성에 대한 권위의 표시로 그렇게 하는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울은 11장 초반에 그리스도인 모든 남자의 머리이고 남편은 모든 여자의 머리라는 표현을 씁니다. 페미니스트들은 이를 남성우월주의적인 표현이라고 주장합니다. 미국 사회는 여성을 비하하는 발언을 하거나 행동을 하면 즉각 법적인 조치가 있는데 그만큼 여성들의 지위가 높아져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근거해서 여자가 머리에 수건을 두르는 것은 남성에 대한 권위인정이라는 해석이 나옵니다. 페미니스트들이 너무 여성 중심적인 해석을 하며 남성을 공격할 때 남성은 방어기재를 사용하게 됩니다. 그래서 옛 해석을 고수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바울은 정말 남성우월주의자였을까요? 그리스도에 이끌렸던 자였기에 결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고 믿습니다.

저와 제 아들의 대화에서 조금은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 첫째 아들( 10)은 어제 저에게 예수님이 하나님이면서(삼위일체)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개념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질문을 했습니다. 저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성진아, 너는 내 아들이지? 동시에 너는 나의 분신이기도 해. 너는 곧 나인 것이지.” 첫째 아들 성진이는 제 아들이면서 제 자신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식을 얼마나 사랑합니까. 아들이니까 사랑하기보다는 내 자신이니까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들이라는 표현은 인간의 이해와 질서를 위한 관계적인 표현이고 아들이 내 자신이라는 것은 그것을 뛰어넘는 형이상학적인 표현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설명하는 것도 그런 방식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남성이 여성의 머리라는 표현은 이해와 질서를 위한 것이지만 결국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11:3)이라는 형이상학적인 표현을 쓰는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라는 성경 말씀을 다시 생각해 봅니다. 머리에 둘러 쓰던 안 쓰던 그게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술을 마시던 담배를 피우던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그러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님을 생각할 때, 우리는 그것을 분별하는 능력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고린도 전서 11장 편지글은 그런 관점으로 볼 때 여성 비하 발언도 아니고 남성우월주의적인 발언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머리로 두기 위한 이해와 질서를 위한 말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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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자주 드는 생각이 있다. 겉모양이 아닌 마음의 중심에 대한 생각이다. 교회를 아무리 열심히 다녀도 마음의 중심에는 예수가 아닌 다른 생각이 자리 잡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교회를 다니지만 마음 속에는 예수가 중심에 자리 잡혀 있는 사람이 있다. 또한 이런저런 상황에서 예수가 마음의 중심에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닌 사람도 있다.

또 다른 예수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오강남 (예담,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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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중에는 예수님을 받아들였으면서도 교회를 다니지 않고 유대인 회당에 다니는 사람이 있고 동남아국가에서는 불교 사원에서 예배를 드리지만 중심에는 예수가 있는 그런 곳이 있다고 한다. 모양새는 기독교가 아닌데 알맹이는 예수교인 것이다.

우리 사회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다. 교회는 다니지 않는데, 마음에 예수를 부인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다. 다만, 교회의 문턱이 너무 높아서, 기독교인들이 만들어 놓은 등이 부담스러워서 교회에 다니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그들을 함부로 평가해서는 된다. 타종교인들도 마찬가지다. 예수님은 그들 모두를 피값으로 사셨음을 우리는 잊어서는 된다.

예수님을 마음에 두게 돕는 것이 우리가 해야 일이다. 그들의 문화를 뜯어고치려고 하니까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우리 기독교인들도 우리 안에 잘못된 문화를 고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기독교의 핵심은 역시 예수님이다. 그의 사랑과 헌신이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보여준 은혜다. 사람들이 그것을 인식하게 된다면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이상의 것은 그들의 선택이다.

물론 예수님을 받아들인 분들이 교회로 와서 교제를 있다면 없이 좋겠지만, 교회로 없는 상황이더라도 그들을 정죄해서는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핏값으로 귀한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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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tree
    2009/05/23 16:13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네...맞는 말씀입니다.


성경: 마가복음 11장23절-24절

예수님의 비유에 대한 이해

예수님은 자신의 존재를 잘 아는 사람에게일수록 강하게 말씀하시는 분입니다
. 제자들에게 손을 잘라라, 눈을 빼라는 등의 말씀을 하신 것은 진짜로 그렇게 하라고 한 것입니까? 그만큼 중요하니 잘 지키라는 뜻으로 강하게 비유를 드신 것입니다. 마가복음 1123절과 24절의 말씀을 보면 산을 움직이는 믿음에 대해서 예수님은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정말로 산을 상상합니다. 이것도 예수님께서 하신 강한 비유였습니다.

강력하게 기억에 남을만한 내용을 제자들에게 설명하셨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그나마 예수님을 이해하는 사람들이었기에 이 정도로 예를 드셨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보시면 예수님이 관계적이면서 기능적인 면을 중시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상황에 따라 말씀의 완급을 조절하시는 모습이 보입니다.

투수의 완급 조절과 예수님의 완급 조절

야구장의 투수를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 투수가 계속 똑같은 스피드로 공을 던진다고 하면 타자가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주 치기 좋겠죠. 투수는 완급을 잘 조절해야 좋은 투수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는 빠른 공을 던졌다가 어떤 상황에서는 느린 공을 던지죠. 또 어떤 상황에서는 변화구를 던졌다가 어떤 상황에서는 유인구를 던지기도 하죠. 그런데 이렇게 다양하게 공을 던지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타자를 아웃시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완급 조절을 잘 하시는 투수의 마음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어떤 때는 강한 어조로 말씀을 전하셨다가 어떤 때는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잘 못 알아듣게 비유로 말씀하셨다가 어떤 때는 그냥 명령을 하시기도 합니다. 여기서 그 분의 목적은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이행하는 것이었슨비다. 그 목적을 위해 완급 조절을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야구를 하셨다면 제구력이 뛰어난 그리고 완급 조절이 뛰어난 투수였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은 직구 투수가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을 마치 계속 빠른 공만 던지는 투수로 생각합니다. 항상 빠른 직구로 상대에 직격탄을 날리는 분으로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나 사역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예수님은 완급을 조절하는 제구력(control)이 뛰어나고 커맨드(command)가 좋은 투수였습니다.

야구를 볼 때도 그렇습니다. 투수가 얼마나 빠른 공을 던졌느냐만 보면 야구 정말 재미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컴퓨터 투수' 그렉 매덕스의 환상적인 완급 조절의 경기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완급 조절, 컨트롤 등이 중요하다는 것을 아는 야구팬은 투수와 타자의 신경전을 재미있게 볼 수 있고 그래서 공 하나하나가 흥미롭게 됩니다.

그렉 매덕스 (Gregory Alan Maddux) / 외국야구선수
출생 1966년 4월 14일
신체 키183cm, 체중84k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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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사역도 비슷합니다. 예수님을 그저 직구만을 던지는 투수로 이해했을 때 성경은 싱겁기 짝이 없습니다. 제대로 성경을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완급 조절을 잘 하는 투수로 이해한다면 성경의 다이나믹한 면과 유연성에 감탄을 하게 됩니다.

그의 말씀의 뜻을 잘 이해해야!

오늘 말씀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직구 투수만으로 이해하면 우리는 "그럼 산을 움직이지 못하면 믿음이 없다는 말인가"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완급 조절이 뛰어난 투수로 이해하면 "..산을 옮기는 것처럼 어려운 일들도 믿음을 가지면 이겨낼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는 산과 같이 앞에 우뚝 서 있는 장벽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장벽을 기도와 믿음으로써 넘어서야 하는데 우리는 당황하며 어쩔 줄 몰라합니다. 제가 지금 그렇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옆에 계심을 알아야 하는데 그렇게 생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가 기억해야 할 두 가지는 예수님은 완급 조절을 잘 하시는 투수와 같은 분이었다는 것
, 그리고 그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있다면 그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적용: 어려움을 극복할 믿음을 갖게 해달라는 기도. 그것밖에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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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hyuny
    2009/04/21 03:38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지금은 장벽같이 보이는데...그렇군요!
    한걸음씩 가다보면 지나왔던 날과 같이 하나님께서 일하신 것을 볼수 있으리라...
  2. Joe Yang
    2009/04/21 07:12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구원투수로 나타나실만도 한데 나타나지 않으실 때는 거기에도 뜻이 있으시지요. " 주의 손이 짧아서 구원하지 못하시는 것도 아니고, 주의 귀가 어두워서 듣지 못하시는 것도 아니다. "
    • 2009/04/21 11:47
      댓글 주소 수정/삭제
      구원투수!!! 필요해요....
  3. Joe Yang
    2009/04/21 22:45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감독이 구원투수에게 싸인을 보내는 중이라 믿고 기도합니다.


말씀: 로마서 1장1절-7절


복음은 무엇일까( 11)

복음이 무엇일까요? 우리는 복음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듣습니다. 교회를 다니시지 않거나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복음이라는 말을 번도 듣지 못한 분은 없을 것입니다. 복음(the Gospel)’ 사전에서 찾아보니 매우 반갑고 기쁜 소식이라고 나옵니다. 매우 반갑고 기쁜 소식은 우리를 정말로 기쁘게 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반갑고 즐거운 소식이 그렇게 들리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반갑고 기쁘게 설명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많은 이에게 굴레가 되었습니다.

일본에서는 배우 배용준 씨가 욘사마(the lord Yon) 불립니다. 욘사마가 되었을까요? 일본 여성들에게 복음 던졌기 때문입니다. ‘겨울 연가(Winter Sonata)라는 드라마에 나오는 배용준 씨는 일본 여성들에게 따뜻한 남자’ ‘돌봐주는 남자 비춰집니다. 물론 그것은 드라마 주인공에게 부여된 허상입니다. 그럼에도 남성우월주의적 사회에서 배용준이라는 배우가 던지는 메시지는 그야말로 복음입니다. 매우 반갑고 즐거운 소식인 것입니다. 최근 한류에 관한 영문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학자들은 겨울 연가라는 드라마가 주는 메시지는 그야말로 복음수준이었다는 동의합니다. 제가 아는 대만 여성은 대장금이라는 드라마를 4번이나 봤다고 고백했습니다. 드라마에도 역시 매우 반갑고 기쁜 소식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진짜 복음을 갖고 있는데도 전하지 못함

성경은 진짜 복음 담고 있지만 이것을 일부 교회와 교회 리더들이 복음으로 전하지 않고 부음(訃音)으로 전하는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진정한 제자들은 복음을 제대로 전합니다. 부음은 모두 아시겠지만 사람이 죽었다는 기별입니다. 이상하게 복음을 들어야 우리는 부음 듣는 같은 기분이 듭니다. 교회에선 복음 전한다고 하는데 우리에게는 부음처럼 들릴까요. 그럴까요?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 복음이 전해지는 아니라 내가 복음 전해지기 때문입니다. 내가 만든 복음이 바로 내가 복음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 복음의 의미를 분명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욘사마(the lord Yon) 일본 여성들에게 (the lord)’ 것처럼 예수님은 크리스천에게 (the Lord) 되시는 것입니다. 겨울 연가가 따뜻한 남자, 따뜻한 사랑의 메시지를 전해줬다면 예수 복음은 영원한 생명과 기쁨의 소식입니다. 욘사마(the lord Yon) 비유를 통해 사람들이 the Lord Jesus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예수 복음이 아름다운 이유

예수 복음이 욘사마 복음보다 귀하고 아름다운 이유가 있습니다. 매우 반갑고 기쁘게 들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욘마사가 드라마에서 주는 기쁨에 비할 없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화와 은혜( 17)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 있어도 평화와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복음은 너는 앞으로 문제가 없을 거야 아니라 어떤 상황 속에서도 예수께서 주시는 평화와 은혜가 있는 입니다.  물론 우리는 때론 힘들고 죽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 순간이 분명 있습니다. 그렇지만 때에 예수 복음을 접하면 다시 평화와 은혜를 예수께서 주십니다. 일본 여성들은 욘사마 복음 믿고 순종( 1:5)하고 그를 추종했습니다. 그들에게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기쁨, 영원한 평강을 주는 예수 복음은 말로 형용할 없는 기쁨을 우리에게 줍니다. 체험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사실 말로 표현해도 없습니다. 체험해보시고 싶으십니까? 지금 눈을 감고 예수께 간절히 기도해보십시오. 당장 무슨 변화가 없는 같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반드시 응답하실 것입니다. 그는 진정으로 신실한 우리의 (the Lord)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가장 어려울 , 가장 바쁠 , 가장 고통 받을 , 우리 속에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적용

은혜와 평화의 복음을 듣고서도 속에서 그것을 누리고 살지 못했습니다. 하루 24시간 중에 나는 은혜와 평화를 얼마나 누리고 살고 있을까. 누리지 못하면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살고 있는 나를 보면서 복음을 생각하고 은혜와 평화를 누리길 기대해봅니다.

Think Deeper

창녀나  세리들은 분이(예수님이) 그들의 직업적 평판에는 관심이 적은 대신 그들의 영혼에 담긴 슬픔과, 그들의 삶을 지경으로까지 몰고 사망의 악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갈망을 주목하신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깨끗한 영혼을 원했고, 예수님은 용서와 구속을 통해 그들을 도울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것이 그분의 복음이었다. <고든 맥도날드,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 p.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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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4/09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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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밀댓글 입니다
  2. 2009/04/09 21:38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맞습니다. 동감합니다. 주님께서 문화 속에서 하시는 일들...공감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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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속에 있는 예수(Christ in Culture)를 주관점으로 묵상 내용과 생각을 나눕니다. Since 2006/01 (http://blog.daum.net/bbjjp) by 밝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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