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와 골로새 교회에 대해 하나님의 질서를 강조했다고 하면 빌립보 교회에서는 은혜를 주로 이야기했다고 있습니다. 오늘 소개되는 갈라디아 교회에서는 자유가 강조됩니다. 4 교회에 편지에서 하나님의 속성을 파악할 있습니다. 바로 질서, 은혜, 자유입니다.

질서를 중요시하는 하나님, 은혜를 통해 구원을 허락하시는 하나님, 구원으로 자유를 주시려는 하나님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고린도 교회나 골로새 교회는 분열과 이방신 숭배, 이단 출몰로 질서가 무너졌습니다. 질서를 먼저 잡으려고 했던 바울은 주로 질서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빌립보 교회는 바울이 참으로 마음에 들어하는 교회입니다. 신앙 성숙을 위해 계속 은혜를 강조하고 설명합니다.

갈라디아 교회에는 자유를 강조합니다. 갈라디아 교회에는 유대의 전통과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지켜야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유대의 전통과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사도 바울에 흠집을 냈습니다. 바울은 그래서 장황하게 자신의 사도됨을 설명합니다.

자신이 사도로서 활동한 내용을 설명한 바울은 초등학문과 같은 율법에 묶여 있는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자유를 선포합니다. 그릇된 지도자들로 인해 이들은 율법에 갇혀 살고 있습니다. 성령의 지배를 받으면 사실 율법은 초등학문이 맞습니다. 성령은 고등학문이고 율법은 초등학문입니다.

오늘날 지나칠 정도로 율법적인 교회가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그런 교회가 숨이 막혀 다니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교회에 점점 젊은이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바로 이런 교회들에 필요한 메시지가 갈라디아서 서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직도 수많은 교회가 초등학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초등학문이 필요없는 것은 아닙니다 . 초등학문은 고등학문을 위한 기초가 됩니다. 그러나 초등학문이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지는 않는다는 갈라디아서의 핵심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믿음이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라고 (갈라디아서 325).

하나님의 질서는 기초가 되고 기초 위에 은혜와 자유가 서게 됩니다. 갈라디아 교회는 이미 기초는 잡혀 있다고 있습니다. 위에 자유를 세워야 하는데 일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유를 강조하게 됩니다.

너무 율법주의적인 교회가 있다면 갈라디아서를 해석해서 강해로 설교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핵심은 율법을 무시하자는 아니라 율법의 기초 위에 은혜와 자유 그리고 구원에 이르는 복음을 전하자는 것입니다. 초등학문에서 벗어나야 세상과도 올바른 복음을 나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밝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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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rough The Cross
Through The Cross by loswl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빌립보 교회는 사도 바울이 아끼고 기쁘게 생각하는 교회였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혼란의 연속인 교회라 사도 바울의 특별 기도와 관심이 요청되는 교회였습니다. 골로새 교회는 사도 바울이 직접 세운 교회는 아닌 듯합니다. 자신의 영적인 아들이었던 에바브라가 골로새 지역에 세운 교회로 보여집니다. 가지 다른 상황을 보면서 그가 어떤 관점으로 복음을 전했는지 비교하면 흥미롭습니다.

문제가 가득한 혼란의 교회(고린도 교회) 향해서 그는 질서를 강조했습니다. 질서의 하나님을 염두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빌립보 교회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유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더욱 깊은 은혜와 자유를 경험할 있도록 편지를 썼습니다.

골로새 교회에 대해서는 자신이 세운 교회가 아니였기에  일반적인 교리와 권면이 주를 이룹니다. 골로새 교회는 그리스도를 깎아내리며 율법과 전통을 중시하는 이단적인 모습을 보였는데 바울이 세운 교회였더라면 고린도 전서에 나오는 같은 강한 어조로 글을 썼을 것입니다. 그러나 골로새서를 읽어보면 그런 느낌이 전혀 들지 않습니다. 마치 신학교 교수가 모르는 교회에서 강의를 하는 것과 같은 느낌을 줍니다.

골로새의 이단들은 유대 율법주의, 헬라의 철학, 동양의 신비주의를 모두 혼합했다고 학자들은 기록합니다. 실제 골로새서에는 그러한 내용들이 엿보입니다. 만약 사도 바울이 세운 교회가 이런 지경이면 그는 감정이 섞인 투로, 길고 장황하게 글을 썼을 것입니다. 골로새서를 그렇게 썼다면 아마도 골로새 교회의 반발이 있었을 것입니다.

비교적 점잖게 이유가 여기에 있는 같습니다.

빌립보서, 고린도전서, 골로새서를 읽으면서 드는 생각은 성경을 읽을 성경 저자의 상황과 독자의 상황을 항상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 간에 교류됐던 편지글을 읽는 21세기를 사는 독자의 태도도 중요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다음과 같이 생각하며 사도 바울의 편지글을 읽습니다. “사도 바울이 나의 멘토였더라면 나에게 어떻게 편지를 썼을까.” 내가 있는 교회에 편지를 썼더라면 어떻께 썼을까. 내가 속한 지역에 대해 뭐라고 편지를 썼을까. 내가 살고 있는 나라에 대해 뭐라고 했을까.

오래전에 기록된 바울의 편지를 통해 오늘날을 사는 우리에게 주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글을 쓰는 (바울) 읽는 (골로새 교회 교인) 그리고 글을 엿보는(?) (성경 독자)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않으면 우리는 엉뚱한 해석을 하게 됩니다. 진리에 도달하지 못하게 됩니다.

재범 (박재범) / 국내가수
출생 1987년 4월 25일
신체 키174cm, 체중60k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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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PM 재범 군을 생각합니다. 마이스페이스라는 블로그에 친구와 사적으로 대화 나눈 어렸을 때의 글에 한국 전체가 들썩거렸습니다. 우리가 살펴봐야 것은 재범 군이 썼던 일종의 전자 편지 글은 친구에게 쓰는  사적인 글이었다는 것과 그것은 미성숙했던 10 중반의 어린 아이가 글이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을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빌립보 교회, 골로새 교회 교인들이 읽도록 사적인 편지를 썼습니다. 당시 교인이 많지 않았던 것을 감안하면 사적인 편지라고 있습니다. 편지글이 정경이 되어 성경이 됐을 우리는 사적인 편지글을 보며 21세기를 사는 우리가 어떻게 글을 받아들여야 하는지 생각을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기독교인들을 마구마구 잡아넣는 사람이었다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나고 역사적인 기독교 선교사가 인물입니다. 그의 미성숙했을 때의 행동이 기록되었지만 그는 여전히 사도로서 선교일을 있었습니다.

가지 교훈이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바울의 사적인 편지글을 성경 66권에 넣도록 하신 것은 우리가 글을 읽으며 우리가 사는 시대에 적용할 있는 근거를 주시기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가 교회에 글을 읽으며 과연 우리가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해석을 것인지를 고민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닌 그대로 옮겨서 적용할 경우 상당한 무리가 따르고 진리가 전달되지 않을 가능성이 큽니다.

만약 우리가 사도 바울의 편지글을 우리 교회에 해석없이 그대로 전달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사실 전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의 편지글은 팩트(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러나 진리가 아닙니다. 진리는 당시 사도 바울에게 주신 주님의 마음을 읽으면서 뜻을 헤아리면서 해석한 내용을 전할 그것이 진리가 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를 자유케하지 않지만 진리 우리를 자유케 합니다.

번째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바로 성숙하지 않았을 때의 , , 행동을 갖고 너무 지나칠 정도로 매도하는 우리의 미성숙한 행동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과거 미성숙한 행동이 문제가 되어 그가 사도로서 일을 하지 못했더라면 기독교 역사는 어떻게 됐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물론 당시 그런 문제가 지적되었을 것입니다. 실제 바울이 변화되었다는 말을 들었을 그의 회심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대체로 그의 과오가 용서되었기에 사도 바울은 예수님 이후 가장 위대한 선교사가 되었던 것입니다.

과거(!) 있던 사도가 사적인 편지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는 굉장히 중요한 이슈인 같습니다. 그런 관점으로 골로새서, 빌립보서, 고린도전서를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사실(facts) 보던 눈에서 진실(truths)이 발견될 것입니다. [밝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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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06 - 빌립보 교회와 고린도 교회(1)-대형교회가 좋은 교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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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는 사도 바울의  유럽 선교지인 마게도냐 지역 빌립보 도시의 교회에 편지입니다. 빌립보 교회는 고린도 교회와 비교하면 성숙도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창설된지 얼마되지 않은 같고 이방신을 섬겼던 사람들이 많은 교회였습니다. 반면 빌립보 교회는 복음을 받아들인 많이 성숙해져 바울의 깊이 있는 편지 받을 만한 교회였습니다.

교회가 고린도 교회와 비슷한데 빌립보서의 메시지를 전하면 사람들에게 닿지도 않고 메시지 전달이 정확히 되지 않을 것입니다. 반면 빌립보 교회에 고린도 교회에 했던 메시지를 그대로 전하면 신앙 성숙이 이뤄지지 않을 것입니다.

빌립보서의 내용이 개인적으로 위로가 되고 은혜가 되겠지만 교회라는 집단의 개념으로 읽을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개인 차원에서 메시지를 받는 아니라 교회라는 단체의 차원에서 읽을 제대로 해석을 하고 21세기에 적용을 있을 같습니다.

고린도 전서를 보면 하나님의 은혜와 자유보다는 질서가 강조됩니다. 은혜와 자유가 녹아져 있기는 하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질서를 훨씬 강조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유는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이방신에게 다시 돌아갈 가능성이 분별력이 약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내에서 분쟁이 극심합니다. 온갖 죄로 인해 교회의 질서가 무너질 있는 상황입니다.

빌립보 교회는 어떤가요. 빌립보서 13절부터 5절까지 보면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 교인들에 대해 기쁘고 감사한 마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내용을 살펴봐도 격려와 칭찬의 내용이 주를 이룹니다. 그러면서 새로운 도전을 그들에게 던져줍니다.

사도 바울은 현재 감옥에 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서는 옥중서신이라고 불립니다. 감옥에 있다는 것은 인간적으로 비참한 상황입니다. 가진 아무 것도 없습니다. 있는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감사가 넘칩니다. 감옥을 지키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할 있어서 좋고, 세상의 소유보다 예수를 소유한 것이 기뻐서 좋고, 이런 상황에서도 가슴 깊은 곳에서 샘솟는 기쁨이 좋고, 빌립보 교회의 돌봄을 받는 것이 좋습니다.

고린도 전서에 나오는 고린도 교회 같았으면 사도 바울이 이런 메시지를 전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21세기의 교회는 고린도전서를 읽으며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언젠가는 빌립보 교회처럼 되어야겠다 희망을 품어야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설교자들은 고린도전서의 내용을 마치 교회 밖의 세상 일인 것처럼 말하면서 세상과 교회가 담을 쌓도록 하고 빌립보 교회가 자신들이 리드하는 교회로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빌립보 교회같은 곳이 세상에는 있습니다. 드러나지 않게 빌립보 교회처럼  기쁨으로 움직여지는 교회가 있습니다.

하지만 요즘 눈에 보이는 교회들은 고린도교회의 모습입니다. 아직 성숙되기 전의 모습입니다. 빌립보 교회처럼 되기를 사모하다보니 설교자들은 빌립보서를 놓고 설교를 많이 하시는 같습니다. 그게 목회자들의 꿈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빌립보서의 내용을 암송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빌립보서에는 유명해진 구절이 많이 있죠.

Epistles of the Apostles
Epistles of the Apostles by simpologist 저작자 표시비영리

미국 교회와 한국 교회를 대체로 고린도교회와 비슷한 모습입니다. 빌립보 교회같은 교회는 있기는 하지만 드물죠. 또한 그런 좋은 교회들은 사실상 드러나지를 않습니다.

우리 교회가 마치 빌립보 교회인 것처럼 착각에 빠질 현실과 이상의 괴리가 생기는 것입니다. 이상은 빌립보 교회인데 현실은 고린도 교회이니 말입니다.

그렇다면 빌립보 교회는 어떤 교회이길래 사도 바울이 좋아하는 것일까요.

먼저, 싸움과 분쟁을 해도 귀엽게(?) 합니다. 서로 복음을 전하려고 싸움을 합니다. 바울은 이를 귀엽게 같습니다. 118절에 같은 경쟁을 기쁘게 생각한다는 말을 합니다.

고린도 교회에 나타나는 분쟁과는 차원이 다르죠. 고린도 교회에서는 나는 바울 편이다, 아볼로 편이다와 같은 걸로 싸움을 했습니다. 오늘날 교회와 비슷한 모습이죠. 누구 목사 파다 누가 장로파라고 해서 분열이 일어나죠.

빌립보 교회는 또한 관용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4:5). 어려움 중에 자족하는 교회였습니다. (4:14). 사도의 사역에 참여한 유일한 교회였습니다. (4:15). 교회에서 무엇이 보이십니까? 저는 은혜와 자유가 보입니다. 관용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관용을 알게 됐음을 의미합니다. 바로 은혜입니다. 어려움 중에 자족한다는 것은 세상에서 자유하다는 말입니다.

성숙해 있는 교회이기에 사도 바울의 메시지는 굉장한 깊이가 있습니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1:21)

너희 안에 마음을 품으라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2:5-11)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4:6)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3:20)

이런 내용을 고린도 교회에 전했다면 도무지 무슨 소리인지 몰랐을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는 기독교의 기초에 대한 이야기를 했을 뿐입니다.

성숙한 교인, 교회에 대한 사도 바울의 메시지는 땅에서는 낮아질 있고 염려하고 고통할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고 그에게 의지하면서 살아가다보면 죽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초신자들에게는 너무 어려운 내용입니다. 초신자에게는 질서 말하면서 하지 말아야 것을 꼭꼭 집어주는 조금 낫습니다. 빌립보서를 읽으면서 자신이 속한 교회가 빌립보서에 나온 내용들이 경험되어지지 않고, 그러한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는다면 고린도전서, 갈라디아서, 골로새서가 훨씬 공감이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좋은 교회를 판단할 교회 건물 크기, 교인수, 시설, 교회 프로그램으로 판단합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와 빌립보서를 읽으면서 빌립보서의 내용과 공감되는 부분이 많은 교회는 규모에 관계 없이 좋은 교회라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여러분의 교회는 어떤 교회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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