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월5일자 미주 중앙일보 종교면에 실린 글입니다.

박병기/Jesusinculture.com 운영자 
 
누구나 인생에서 한 번쯤은 짝사랑의 경험이 있다. 나 역시도 결혼하기 오래 전에 한국에 사는 어떤 여학생을 짝사랑한 적이 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같은 반에서 지내면서 좋아하기 시작해 이후 무려 6년 동안이나 얼굴을 보지 못한 상태에서 좋아했고 미국으로 이민 온 후 2년째 되는 해에 그를 만날 수 있었다.

오랫동안 모습도 가물가물한 사람을 짝사랑하고 기다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나는 잘 안다.

8년 동안 한 번도 만나지 못했고 전화통화도 해보지 못한 여자를 짝사랑함은 쉬운 일은 아니다. 요즘 와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그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한 번 제대로 대면해보지도 못했고 성경을 통해서만 만날 수 있었던 하나님을 사랑함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그 분을 사랑한다. 나를 만나주지 않는 것 같은데 그와 대화를 해본 것도 아니고 음성을 들은 것도 아닌데 그를 사랑한다. 왜 그를 사랑할까.

그냥 좋은 것이다. 특별한 이유도 없이 마냥 좋은 것이다. 그렇게 좋아하다 보면 때로는 심장으로 대화할 기회도 있다. 오디오나 비디오로 확인할 수 없지만 가슴에 대고 속삭이시는 그분의 기운이 느껴진다.

초등학교 6학년 때 그녀의 졸업 사진 한 장으로 그리움을 달랬던 것처럼 그의 발자취가 남겨진 성경 속의 이야기를 통해 그에 대한 그리움을 달랜다. 빨리 보고 싶지만 쉬운 일이 아니다. 그 날을 숨죽이며 기다려야 한다. 그를 만나는 시간까지 너무나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하기에 그분은 자신의 모습으로 만들어진 인간을 대신 사랑하라고 하신다. 그게 그분을 사랑하는 방식이라고 하신다.

그런데 쉽지 않다. 그리워하는 분 대신에 다른 이를 사랑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 분이 원하시니 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삶에 찌들어 그에 대한 그리움도 식을 때가 있고 그분의 존재마저도 의심할 때가 있다. 과연 나를 정말 기다리는지 정말 계시긴 한지 그에 대한 족적이 믿을만한 것인지 등에 대해 잠시나마 의심할 때가 있다.

하지만 나에겐 그를 그리워하는 DNA가 심겨진 것 같다. 어릴 적 짝사랑녀를 그리워했던 것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창조주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더해지는 것 같다. 8년 동안 기다렸던 그녀를 만난 순간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다. 이 말을 했더니 아내는 "심장이 터지기 전에 나에게 얻어터지고 싶냐"고 말해 우리는 5분 동안 깔깔대며 웃었다. 우리는 이 말을 나누며 한바탕 천국에서 경험할 폭소로 쏟아지는 엔돌핀에 즐거워했다.

나의 짝사랑은 8년 동안의 기다림이었으니 얼마나 긴 여정이었던가. 이보다 더 긴 기다림 끝에 하늘에서 만날 그분을 보게 될 순간의 느낌은 그것에 100배 1000배 10000배 더 환희에 휩싸일 것이다. 내가 짝사랑했던 그녀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지만 내가 하늘에서 만날 그 분은 나보다 앞서 나를 짝사랑했던 분이다. 그리워하며 가까운 또는 먼 미래에 만나게 될 그를 그리며 2010년에는 더욱 그가 주실 일에 매진하겠다는 결심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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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Tiny
    2010/02/04 04:41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실감납니다...좋은 글 감사 드립니다.
    • 밝은터
      2010/02/05 11:57
      댓글 주소 수정/삭제
      답글에 감사합니다.

영어 단어 중 'brainwash'의 사전적인 의미는 '세뇌'. '세뇌'의 의미를 찾아보니 '본디 가지고 있던 생각을 다른 생각으로 개조한다'라고 나와 있다. 몇 년 전에 CNN닷컴의 톱기사로 '어린이 용병'이라는 글을 읽을 기회가 있었다. 전 세계 어린이 용병(child soldier) 25만 명에 이른다는 내용이었다.

아직 도덕과 가치관에 대해 교육을 받지 못한 어린이에게 '총으로 적을 죽이라'는 세뇌를 하면 그들은 어른보다 더 깔끔하게(?) 상대를 제거한다고 CNN은 보도했다. 어린이의 나이는 8세부터 10대 초중반이라는 사실이 충격적이다.

2007년 한국의 유명 탤런트 정다빈양이 자살을 했다는 보도가 많은 이에게 충격을 안겨줬다. 가수 유니가 자살한 후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충격은 두 배였다. 이들은 왜 자살을 했을까. '세뇌'의 영향인 것 같다. 그들은 이 세상의 '세뇌'로 인해 '본디 가지고 있던 생각'이 깨끗이 청소(wash)됐고 새로운 사상으로 무장했다. 바로 '메뚜기도 한철'이라는 사상이다. 지금 돈을 모아놓아야 미래가 안정된다는 그런 사상이다. 그들은 그러한 사상에 '세뇌'되어 불안해했고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렇기에 비난에 민감했고 괴로움을 피하기 위해 자살을 선택했다.

 

 영화 배우 안성기씨는 당시 일간지 칼럼에서 "인기에 따라 부침을 거듭하는 게 연예인의 운명이지만 모든 일에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않고 자신이 선택한 일 자체를 감사하게 여기는 마음이 필요하다"고 연예인 후배들에게 강조한 바 있다.

 

소위 '성공'한 자만이 인정을 받는 연예계에서 조금만 인기가 떨어져도 불안해하고 우울증에 걸리는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포츠계도 비슷하다. 인기있던 선수가 인기가 떨어지면 불안해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스포츠 스타들 중 팬들의 박수가 사라지면 공허한 마음에 자살하거나 마약에 손을 대는 선수는 상당수다. 

 

 정다빈, 유니의 자살 사건을 보면서 더욱 안타까웠던 사실은 이 두 사람이 기독교 신자였다는 것이다. 특히 정다빈은 매니저 말을 빌리면 '절실한' 기독교 신자였다고 한다. 두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첫 번째는 '절실한' 신자 정다빈은 교회에서 '성공에 대한 세뇌'를 재확인했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 요즘 교회를 가보면 대부분(그렇지 않은 교회도 물론 있다) '성공'을 지나치게 강조한다. 그게 신의 축복이라고 한다. 물론 축복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물질적 축복이 지나칠 정도로 강조돼 신자들은 '물질적 성공을 다짐하며(!)' 교회 문을 나선다. 정다빈은 어쩌면 그 물질적 축복 메시지에 재무장되어 교회 문을 나섰을지 모른다. 두 번째는 교회에서 청빈과 작은 것에도 감사한 삶을 이야기했지만 본인이 워낙 '성공 신드롬'에 세뇌되어 그런 메시지는 들어도 들리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설교 메시지가 '성공 신드롬' 메시지를 밀어내지 못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성경의 인물들을 보면 고전 끝에 축복을 받은 이들을 여러 명 볼 수 있다. 대표적인 인물이 예수님이고 대부분의 인물은 어려움을 견디고 하늘의 축복을 받았다. 그때만 조금 견뎠더라면 좋았을텐데 견딤의 미학은 교회를 지배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기독교 성서와 기독교 역사를 보면 축복의 신학보다 인내의 신학이 더 크게 자리하고 있었음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 된다. 견디면 반드시 축복은 기다린다.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지금 옆에 신문 또는 잡지가 있다면 한 번 열어보자. 모두 소위 말해 성공한 자의 성공 또는 실패 이야기로 도배되어 있다. 결국 지금 내가 쓰는 이 글도 성공한 유명인의 실패담이다. 심지어 신문의 종교면에도 성공한(?) 자의 스토리로 가득하다.

 

 왜 그럴까? 세상 사람 대부분이 성공해야 한다는 '세뇌'를 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으로 세뇌되어야 하는가. 오늘 하루 우리는 무엇을 읽고 무엇을 하며 세뇌를 당해야 하는가. 어떤 세뇌를 당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그것은 우리 각자의 선택이다. 우리에게는 다양한 선택권이 분명히 있다. [밝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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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ove of God
The Love of God by JustinLowery.com 저작자 표시변경 금지


 부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나요? 이런 질문을 우리는 자주 던집니다. 이 질문에 대한 정답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지혜로운 답은 있습니다.

 성경에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분명히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 내가 다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지나가는 것이 더 쉽다" 하시니, 제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매우 놀라서 "그러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마태복음 19:23-24. 표준 새번역)

  이때 예수님은 지혜로운 답변을 하십니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무슨 일이나 다 하실 수 있다." (마태복음 19장 26절. 현대어 성경)

 다시 한 번 질문을 합니다. 부자는 천국에 못 가나요?

 예수님이 하신 이 말씀의 핵심은 "하나님께서는 무슨 일이나 다 하실 수 있다"이고 "하나님이 원하시면 부자도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때 하나님께 흡족한 부자가 되려면 가난한 사람들을 잘 돌봐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부자들은 가난한 분들을 업신여기거나 그들을 이용해 부를 더욱 쌓아가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2장 5절에서 6절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들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가난한 사람을 택하셔서, 믿음이 좋은 사람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그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지 않으셨습니까? Listen, my beloved brethren: Has God not chosen the poor of this world to be  rich in faith and heirs of the kingdom which He promised to those who love Him?

그런데 여러분은 가난한 사람들을 업신여겼습니다. 여러분을 압박하는 사람은 부자들이 아닙니까? 또 여러분을 법정으로 끌고 가는 사람도 바로 그들이 아닙니까? But you have dishonored the poor man. Do not the rich oppress you and drag you into the courts?“ (표준 새번역/NKJV)

 가난한 사람을 돌보기 위해 부자는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요? 물론 행위로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만 야고보서에 나온 것처럼 하나님의 특별 관심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있는 만큼 하나님을 흡족하게 하기 위해 부자는 그 마음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부자가 가난한 사람을 돕는 방법은 역시 헌금을 하거나 기부를 하는 것입니다. 크리스천의 헌금 생활은 그래서 굉장히 중요합니다. 부자의 십일조와 가난한 자의 십일조를 생각해 볼 때 부자는 십일조를 해도 남는 것이 많지만 가난한 자는 십일조를 하면 남는 것이 적습니다.

 예를 들어, 부자가 1억 원을 벌었을 때 1천만 원을 십일조로 헌금하면 9천만원이 남지만 가난한 사람이 1백만 원에서 10만 원을 헌금하면 90만원밖에 남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회 복음'에 대한 기독교 전문가인 로널드 사이더 목사는 '누진 헌금'를 강조합니다. 최저 생계비에 대해서는 기존의 십일조를 내고 그 이상의 수입에 대해서는 십의 이조, 십의 삼조를 내야 정당한 것임을 그는 강조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오해할 소지가 있는 것은 하나님은 크리스천의 돈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께 얼마나 복종하고 있는 지를 보십니다.

 개인적으로 이런 방법을 적극 권합니다. 최저 생계비에 대한 십일조는 교회에 헌금하고 나머지 누진 십일조를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기관에 헌금하면 이 사회에 정의가 조금은 회복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최저 생계비는 사이더의 경우 '기초 생활비'로 명명하는데 기초 생활비는 [현재 살고 있는 나라의 최저 생계비+자녀 학교 교육을 위한 기본 비용(과외 비용 제외)+세금+약간의 비상금]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교회가 가난한 자를 돕는데에 많은 지원을 한다면 교회에 헌금에도 문제가 없겠지만 그렇지 않은 교회라면 어려운 분들을 돕는 단체에 기부하는 것도 아름다운 일이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일 것입니다.

 헌금을 할 때 다음과 같은 것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1. 내가 다니는 교회는 가난한 자를 위해 얼마나 교회의 예산을 쓰고 있나.

2. 내가 '누진 십일조'를 기부하려는 비영리 단체는 어려운 분들을 돕는 것에 비해 자체 운영비로 얼마나 쓰고 있고 고위 관리들의 월급은 어느 정도 나가는 지, 재정 관리가 투명한지를 알아보아야 합니다.

3. 헌금은 하나님의 마음이 가는 곳에 써야 합니다. 나의 의를 드러내기 위한 헌금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그것을 점검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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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서 40장22절에는 "땅에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 보시기에는 메뚜기와 같다"(표준새번역)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 말씀을 읽는데 영화 '앤트 불리(Ant Bully)'가 생각났습니다. 그런 메뚜기와 같은 존재를 그렇게 아끼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생각나게 하는 영화가 앤트불리입니다.

이 영화를 본 후 쓴 감상문을 잠시 소개합니다.



앤트 불리(Ant Bully)는 3D로 제작된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입니다. 3D로 볼 경우 눈앞에서 펼쳐지는 영화는 그 자체로도 처음부터 끝까지 관심을 끌기에 충분합니다.

만화 영화의 주인공인 루카스는 외톨박입니다. 루카스는 골목대장이 놀리고 괴롭히면 마당에 있는 죄 없는 개미집을 망가뜨리며 분풀이를 하곤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는 작은 개미가 되고 맙니다. 저는 이것을 힘이 있는 자가 힘이 없는 자의 세계로 가서 그들의 어려움을 현장 체험하는 내용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루카스는 개미들의 상황을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힘있는 인간들이 얼마나 개미들을 못살게 굴고 괴롭히는지 그는 깨닫게 됩니다.

이 영화는 단순히 인간이 개미를 괴롭힌다는 차원을 넘어 이 사회에서 힘없는 자들이 힘 있는 자들에게 개미 정도로밖에 비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나게 합니다.

파워를 가진 자는 이를 깨닫지 못합니다. 그것이 바로 파워의 달콤함임과 동시에 타락의 전조인 것입니다.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영화이지만 저는 이 영화에서 남다른 교훈을 얻었습니다. 상대방의 입장을 최대한 생각해야 한다는 것. 이것이 바로 제가 얻는 교훈입니다.

상대의 입장을 충분히 고려한다면 상처와 아픔이 조금은 줄어들 것이라는 희망도 보게 됩니다.

위 내용은 제가 몇 년 전에 영화 감상문을 적은 것인데 당시에는 힘 있는 자가 힘 없는 자의 세계에 들어가서 그들의 약함을 보며 마음을 함께 하는 대목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최근 이사야서를 읽으면서 앤트 불리가 생각났을 때 조금은 다른 각도에서 보게 됐습니다.

인간에게 작게 보이는 개미와 하나님께 메뚜기처럼 보이는 인간을 대비하게 되었습니다. 

루카스가 개미의 세계로 들어간 상황이 마치 예수께서 이 인간사에 들어오셔서 우리의 고통을 함께 경험하는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메뚜기처럼 본다고 했는데 그 메뚜기가 되어 살다가 그의 나라로 돌아가신 것입니다. 이는 개미가 된 루카스보다 더 작아짐을 의미합니다.

메뚜기처럼 보였던 인간의 세상에서 오셔서 고통을 대신 받는 내용은 이사야서 53장에 나옵니다. 이미 하나님은 인간을 위해 그러한 계획을 세우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태어나시기 몇 백년 전에 그러한 마음을 품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사야서 53장4절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그는 실로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을 대신 받고, 우리가 겪어야 할 슬픔을 대신 겪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받는다고 생각하였다."(표준새번역)

예수님이 이 땅에서 활동하심은 이미 오래전에 예정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업신여겼던 인간을 위해 하신 가장 큰 은혜는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예수의 몸으로 인간사에 자신을 던지신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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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이란 말에는 평화도 있지만 정의, 질서, 조화라는 표현도 있습니다. 그래서 제목을 샬롬 커뮤니티(샬롬 공동체)를 꿈꾸며라고 달아보았습니다. 이 글은 미주 중앙일보 종교면 8면에 지난 2009년 11월4일 실렸습니다. 그림을 클릭하시면 좀 더 큰 크기로 기사를 읽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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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rrow street; Mdina, Malta
Narrow street; Mdina, Malta by foxypar4 저작자 표시

고린도 교회, 골로새 교회가 아직은 어린 아이 단계에 있다고 한다면 갈라디아 교회는 어른이지만 성숙이 교회라고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가 성숙 단계로 들어간 교회라고 한다면 데살로니가 교회는 환난 중에 믿음과 인내로 여러 교회 자랑할 만한 교회가 되었다고 있습니다 (살후 1:4).

성숙한 교회에서는 바울이 칭찬을 많이 하고 덕담을 자주 합니다. 물론 덕담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숙한 교회가 성숙해질 있도록 권면의 내용도 있습니다. 그러나 미성숙한 교회에 대한 권면과는 크게 차이가 있습니다. 물론 모든 교회가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각자 다 문제가 있고, 사람이 모인 곳이라 크고 작은 문제는 계속 터져 나옵니다. 사도 바울의 편지를 읽는 교회의 상황이 여기서 핵심 포인트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사도 바울의 서신을 읽으면 말이 같지만 상황을 알고 읽으면 다르게 느껴지실 것입니다.

교회마다 상황과 사정이 다르고 바울의 책망과 권면도 다른데 역시 그가 하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하심에 대한 소개가 핵심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죽으심(낮아짐) 부활에 관한 내용부터 그리스도의 사랑,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그리스도의 심판을 소개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알아야하겠기에 바울이 사랑장(고린도전서 13) 포함한 같고, 빌립보 교회는 성숙을 위한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의 메시지가 필요했던 같습니다. 이단 문제로 골치 아팠던 골로새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생각함에 대한 내용이 필요했고, 재림의 임박성을 너무 열렬히 기대했던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해서는 그리스도의 심판과 그의 오심을 주로 이야기합니다.

성숙한 교회인가 성숙하지 않은 교회인가에 따라 편지 내용이 크게 다름을 있습니다. 성숙함은 일시적일 수 있습니다. 미성숙함도 마찬가지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편지를 읽는 시점에 그 교회들은 어떤 상황이었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그림을 보면 고린도 교회, 골로새 교회는 질서가 잡혀야 했기에 사도 바울은 율법적인 이야기를 많이 했고 은혜와 자유 그리고 구원의 메시지를 양념을 넣듯이 했습니다.

율법을
지나치게 강조한 갈라디아 교회에 대해서는 은혜와 자유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신앙이 성숙해지던 빌립보 교회,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해서는 구원과 심판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합니다.  이는 무엇을 강조했느냐에 대한 설명이지 다른 부분을 전혀 다루지 않았다는 것은 아닙니다.

위에 거론된 교회는 사도 바울이 편지를 교회들입니다.

로마서는 워낙 다양하고 방대하게 다뤄졌기에 편지의 비교에 포함시키지 않았습니다.

정리를 해보면 위에 소개된 바울의 편지글은 개인차원보다는 공동체 차원에서 함께 읽어야 한다는 , 따라서 내용을 21세기의 기독교 리더가 공동체의 상황에 맞게 재해석하며 공동체적인 해석을 이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교회의 상황에 맞는 강조점이 있어야 한다는 것도 중요한 내용인 같습니다.

설교자는 교회의 상황에 맞는 본문을 골라 설교를 해야하고 공동체는 일방적으로 듣는 아니라 공동체적인 해석을 하는 적극적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건강한 교회로 성장할 있을 것으로 봅니다. [밝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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션 (노승환) / 국내가수
출생 1972년 10월 10일
신체 키180cm, 체중70kg
팬카페 힙합뮤지sean을위한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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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말씀하신 가장 큰 계명이 신명기 26장에도 드러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2장에서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내용이 신명기 26장에도 나타납니다. 이집트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하신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는데 이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표현입니다. 또한 레위인, 외국인, 고아, 미망인에게 수입의 일정량을 나누는 것은 이웃을 사랑하는 표현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는 하나님께 십일조하는 것을 강조하지만 사실 신약과 구약에는 이웃에게 소득을 나누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것처럼 나옵니다. 이웃에게 나누자고 하면 공산주의라고 폄하하며 싫어합니다. 교회에서 성경을 제대로 가르쳤다면 그런 말이 나오지 않을텐데 요즘 한국이든 미국이든 소득을 이웃과 나누자고 하면 좋아하는 기독교 리더가 많지 않습니다.

말로는 나누자고 하지만 실제 그러한 법안이 상정되거나 시스템적으로 나눔을 실천하려고 하면 공산주의라고 싫어합니다.

오히려 기독교 신앙이 없는 분들이 소득을 나누자는 것에 더 적극적인 자세를 갖고 있습니다. 이 같은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을 일부분만 너무 강조한 탓입니다. 대형교회의 경우 점점 부자가 되어 가는데 이웃에 대한 씀씀이는 박한 게 사실입니다. 헌금 대부분이 교회 시스템 유지에 사용되는 게 현실입니다.

하나님께는 돈과 시간의 십일조를 드리는게 자연스러운데 이웃에게는 선뜻 그렇게 할 수 있는 문화가 형성되지 않았습니다.

정혜영 / 탤런트
출생 1973년 12월 14일
신체
팬카페 정혜영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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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훈 / 국내가수
출생 1967년 8월 14일
신체 키186cm, 체중70kg
팬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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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최근들어 기독교 일각에서는 이웃 사랑에 대한 실천을 하는 분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힙합 그룹 지누션의 멤버인 션과 그의 아내인 정혜영 씨가 어려운 이웃을 위해 CF 출연료 1억을 선뜻 내놓고 가수 김장훈 씨도 자신의 재산을 고아원에 끊임없이 기부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니 세상도 박수를 보냅니다. ‘개독교라는 말이 쑥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보이는 사람을 사랑함으로써 실천하라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돈으로 시간으로 십일조를 하게 하는 교회가 많이 있습니다. 이웃을 위한 십일조도 강조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션, 정혜영 부부, 김장훈 씨와 같은 사람이 더 많이 나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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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두느낌님의 믹시

    2009/11/10 18:25
    삭제
    오늘 티비에 션부부가 나오더군요. 그런 이웃 사랑은 자기 부인 사랑으로부터 했다는 데서 더 진가가 발휘되는 것 같은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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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밝은터
    2009/11/10 21:39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참 본 받고 싶은 부부입니다. 감사합니다.


미주 중앙일보 2009년 10월20일자 글입니다. 그림을 클릭하시면 조금 더 큰 크기의 기사를 읽으실 수 있습니다. [밝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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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스만이
    2009/11/10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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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해가 되지 않는 이유는 낮아지지 않아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신명기에 나오는 율법을 보면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적용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습니다. 특히 신명기 25장의 규정은 직접적인 적용이 불가능한 것들입니다. 악인에게 40대 태형을 준다든가, 형제가 사망하면 그 아내를 다른 형제가 데리고 산다든가, 두 사람이 싸우는데 아내가 상대 사람의 음낭을 잡으면 손을 찍는다든가 하는 것은 오늘날 적용하기 어려운 규정들입니다.

그러나 이곳에 나타난 정신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질서를 지키도록 하기 위해 세밀하게 준비한 규정들을 보면서 모세가 하나님이 얼마나 세밀한 분인지 알게 됩니다. 이곳의 율법들은 모두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기 전의 이스라엘 사람들을 위한 것들입니다. 기초를 위한 초등학문과 같은 것입니다.( 3:24).

21세기를 사는 이스라엘 사람들도 여기 나오는 율법의 많은 부분을 따를 경우 무리가 생기게 됩니다. 상황에 맞게 변형하는 상황화가 필요하겠죠. 법의 정신을 아는 게 중요합니다. 초등학문 또는 기초는 세대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신학대학원에 다녔을 때 글렌 스태슨 윤리학과 교수님이 해준 말이 기억납니다. 아프리카에서 온 학생이 있었는데 어떤 분야에서 전문가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그 분야의 기초 과목을 들을 필요 없이 상위 과목을 들으면 졸업이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학교 측은 그 학생이 여전히 기초 과목을 들어야 하는 규정 때문에 규정을 따라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 교수님은 규정의 원리(principle)를 적용해야지 규정을 그대로 율법주의적(legalism)으로 적용하면 학생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했습니다.

논쟁 끝에 그 학생은 기초 과목을 듣지 않고 상위 과목을 곧바로 듣고 졸업을 할 수 있었고 자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법을 해석하는 변호사, 검사, 판사가 있는 것처럼 법은 멈춰져 있는 게 아닙니다. 상황에 맞게 제대로 해석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법이라는 것은 그 원리를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악인에게 태형 40대를 주는 것은 악한 행동에 대해 뉘우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남편이 죽은 여인을 남편의 형제가 돌보게 하는 것은 자칫 방황할 수 있는 여성을 보호하고 가족을 보호하는 법 정신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보호의 개념이 강합니다. 어떤 주석가는 가족 재산의 보호라는 말도 하더군요.

결국은 이 모든 것이 질서에 대한 것입니다. 질서는 따라서 억압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질서가 무너지면 사랑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질서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유를 경험하게 하는 질서입니다. 인간을 억압하고 인간의 자유를 빼앗는 질서가 아닙니다.

집행자
감독 최진호 (2009 / 한국)
출연 조재현, 윤계상, 박인환, 차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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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집행자로 인해 요즘 사형제도에 대한 토론이 진행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데드 맨 워킹이라는 영화에도 이러한 주제가 다뤄지고 있죠.

법은 질서를 위해 필요합니다. 그래서 죄인에게는 적절한 형벌이 내려져야 질서가 잡힙니다. 그 질서는 무고한 시민들에게 은혜와 자유를 경험하게 하고 죄를 짓는 죄인에게도 은혜와 자유를 경험하게 해야 합니다.

극악무도한 죄인은 오랫동안 감옥에서 살게 됩니다. ‘데드 맨 워킹이라는 영화에서 매튜라는 남자는 두 연인의 데이트 현장에서 강간을 하고 살인까지 한 극악한 사형수입니다. 그는 히틀러의 추종자이고 인종차별주의자입니다. 사람들은 그가 사형되어도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실제 그는 사형을 앞두고도 회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그를 헬렌 수녀는 사형될 때까지 도와줍니다.


데드 맨 워킹
감독 팀 로빈스 (1995 / 미국)
출연 숀 펜, 수잔 서랜든, 조안 글로버, 레노어 뱅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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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보면서 헬렌 수녀가 하나님의 마음을 가졌다고 생각했습니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손가락질을 했지만 헬렌 수녀는 수모를 감당하고도 매튜를 끝까지 도왔습니다. 질서를 무너뜨린 자였지만 감방에서 강제로라도 질서를 지킬 수 있는 자였기에 헬렌 수녀님은 은혜와 자유를 경험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질서에 은혜와 자유가 있으면 생명의 길로 갈 수 있지만 은혜와 자유가 없으면 그것은 사망의 길로 인도하게 됩니다.

디트로히 본회퍼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에버하르트 베트게 (복있는사람,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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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신학자들이 질서를 위해 히틀러의 정치에 토를 달지 못햇을 때 디트리히 본회퍼는 히틀러 암살을 준비했습니다. 이는 히틀러의 새 질서 위에 은혜와 자유가 없었기 때문에 내린 결론이었습니다.

신자였던 안중근은 왜 암살을 시도했을까요. 일본 제국주의의 질서 위에 은혜와 자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질서 위에 은혜와 자유가 없으면 우리는 저항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에서 은혜와 자유가 없는 질서에 대해 문제 제시를 합니다. 질서 위에 은혜와 자유가 있으면 그것은 값진 일입니다. 헬렌 수녀님은 의미있는 일을 한 분입니다.

다시 신명기에 나오는 질서를 생각하게 됩니다. 특별히 25장의 질서에 은혜와 자유가 있나 생각해 봅니다. 의인에게 은혜와 자유가 부여되고 악인에게 죄의 대가를 치르고 죄에서 빠져나오게 하는 은혜와 자유가 있습니다. 질서 밖으로 빠져나와 혼란스러울 뻔 했던 남편 잃은 여자에게 은혜와 자유가 주어지며 음낭을 잡혀 성기능을 상실할 수 있는 남자에게 은혜와 자유가 있습니다. 죄를 졌지만 손을 찍힌 여인에게는 은혜와 자유가 없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이 질서는 수정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사형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형 제도는 사형수에게는 은혜와 자유를 빼앗는 질서입니다.

아돌프 히틀러 (Adolf Hitler) / 국외정치인
출생 1889년 4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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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히틀러나 이토 히로부미의 은혜와 자유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그들도 질서 위에서 은혜와 질서를 누려야 하는 인간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너무 많은 사람의 은혜와 자유를 빼앗았던 인물들이었기에 예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그러한 엄청난 파워를 지닌 자들이었습니다.

나영이를 괴롭힌 조두순은 그래서 평생 감옥에 있어야 합니다. 그는 12년 동안 감옥에서 살고 나온 후 다른 어린이들의 은혜와 자유를 빼앗을 가능성이 큰 사람입니다. 수많은 어린이들이 잠재적인 피해자입니다. 질서(감옥) 안에서 그도 은혜와 자유를 체험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에 대한 교화작업이 이뤄져야 하고 그를 품을 헬렌 수녀님과 같은 영적 지도자가 필요하게 됩니다.

우리 사회는 가해자와 피해자를 모두에 은혜와 자유를 경험할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합니다. 그러나 가해자의 파워나 영향력이 엄청나다면 예외적으로 그들에게서 은혜와 자유를 빼앗을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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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히노끼
    2009/11/09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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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서 ,율법, 윤리등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위해 주신 것이고 그것을 잘해석하고 원리를 잘 이해한다면 조금은 덜 다치며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왜 사람을 귀히여기고 사랑하며 존중하며 아끼고 살아야 되는지 알기쉽게 분명히 말씀해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 2009/11/09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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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을 귀히 여기시려는 마음, 본받고 싶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와 골로새 교회에 대해 하나님의 질서를 강조했다고 하면 빌립보 교회에서는 은혜를 주로 이야기했다고 있습니다. 오늘 소개되는 갈라디아 교회에서는 자유가 강조됩니다. 4 교회에 편지에서 하나님의 속성을 파악할 있습니다. 바로 질서, 은혜, 자유입니다.

질서를 중요시하는 하나님, 은혜를 통해 구원을 허락하시는 하나님, 구원으로 자유를 주시려는 하나님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고린도 교회나 골로새 교회는 분열과 이방신 숭배, 이단 출몰로 질서가 무너졌습니다. 질서를 먼저 잡으려고 했던 바울은 주로 질서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빌립보 교회는 바울이 참으로 마음에 들어하는 교회입니다. 신앙 성숙을 위해 계속 은혜를 강조하고 설명합니다.

갈라디아 교회에는 자유를 강조합니다. 갈라디아 교회에는 유대의 전통과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지켜야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유대의 전통과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사도 바울에 흠집을 냈습니다. 바울은 그래서 장황하게 자신의 사도됨을 설명합니다.

자신이 사도로서 활동한 내용을 설명한 바울은 초등학문과 같은 율법에 묶여 있는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자유를 선포합니다. 그릇된 지도자들로 인해 이들은 율법에 갇혀 살고 있습니다. 성령의 지배를 받으면 사실 율법은 초등학문이 맞습니다. 성령은 고등학문이고 율법은 초등학문입니다.

오늘날 지나칠 정도로 율법적인 교회가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그런 교회가 숨이 막혀 다니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교회에 점점 젊은이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바로 이런 교회들에 필요한 메시지가 갈라디아서 서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직도 수많은 교회가 초등학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초등학문이 필요없는 것은 아닙니다 . 초등학문은 고등학문을 위한 기초가 됩니다. 그러나 초등학문이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지는 않는다는 갈라디아서의 핵심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믿음이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라고 (갈라디아서 325).

하나님의 질서는 기초가 되고 기초 위에 은혜와 자유가 서게 됩니다. 갈라디아 교회는 이미 기초는 잡혀 있다고 있습니다. 위에 자유를 세워야 하는데 일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유를 강조하게 됩니다.

너무 율법주의적인 교회가 있다면 갈라디아서를 해석해서 강해로 설교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핵심은 율법을 무시하자는 아니라 율법의 기초 위에 은혜와 자유 그리고 구원에 이르는 복음을 전하자는 것입니다. 초등학문에서 벗어나야 세상과도 올바른 복음을 나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밝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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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rough The Cross
Through The Cross by loswl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빌립보 교회는 사도 바울이 아끼고 기쁘게 생각하는 교회였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혼란의 연속인 교회라 사도 바울의 특별 기도와 관심이 요청되는 교회였습니다. 골로새 교회는 사도 바울이 직접 세운 교회는 아닌 듯합니다. 자신의 영적인 아들이었던 에바브라가 골로새 지역에 세운 교회로 보여집니다. 가지 다른 상황을 보면서 그가 어떤 관점으로 복음을 전했는지 비교하면 흥미롭습니다.

문제가 가득한 혼란의 교회(고린도 교회) 향해서 그는 질서를 강조했습니다. 질서의 하나님을 염두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빌립보 교회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유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더욱 깊은 은혜와 자유를 경험할 있도록 편지를 썼습니다.

골로새 교회에 대해서는 자신이 세운 교회가 아니였기에  일반적인 교리와 권면이 주를 이룹니다. 골로새 교회는 그리스도를 깎아내리며 율법과 전통을 중시하는 이단적인 모습을 보였는데 바울이 세운 교회였더라면 고린도 전서에 나오는 같은 강한 어조로 글을 썼을 것입니다. 그러나 골로새서를 읽어보면 그런 느낌이 전혀 들지 않습니다. 마치 신학교 교수가 모르는 교회에서 강의를 하는 것과 같은 느낌을 줍니다.

골로새의 이단들은 유대 율법주의, 헬라의 철학, 동양의 신비주의를 모두 혼합했다고 학자들은 기록합니다. 실제 골로새서에는 그러한 내용들이 엿보입니다. 만약 사도 바울이 세운 교회가 이런 지경이면 그는 감정이 섞인 투로, 길고 장황하게 글을 썼을 것입니다. 골로새서를 그렇게 썼다면 아마도 골로새 교회의 반발이 있었을 것입니다.

비교적 점잖게 이유가 여기에 있는 같습니다.

빌립보서, 고린도전서, 골로새서를 읽으면서 드는 생각은 성경을 읽을 성경 저자의 상황과 독자의 상황을 항상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 간에 교류됐던 편지글을 읽는 21세기를 사는 독자의 태도도 중요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다음과 같이 생각하며 사도 바울의 편지글을 읽습니다. “사도 바울이 나의 멘토였더라면 나에게 어떻게 편지를 썼을까.” 내가 있는 교회에 편지를 썼더라면 어떻께 썼을까. 내가 속한 지역에 대해 뭐라고 편지를 썼을까. 내가 살고 있는 나라에 대해 뭐라고 했을까.

오래전에 기록된 바울의 편지를 통해 오늘날을 사는 우리에게 주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글을 쓰는 (바울) 읽는 (골로새 교회 교인) 그리고 글을 엿보는(?) (성경 독자)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않으면 우리는 엉뚱한 해석을 하게 됩니다. 진리에 도달하지 못하게 됩니다.

재범 (박재범) / 국내가수
출생 1987년 4월 25일
신체 키174cm, 체중60k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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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PM 재범 군을 생각합니다. 마이스페이스라는 블로그에 친구와 사적으로 대화 나눈 어렸을 때의 글에 한국 전체가 들썩거렸습니다. 우리가 살펴봐야 것은 재범 군이 썼던 일종의 전자 편지 글은 친구에게 쓰는  사적인 글이었다는 것과 그것은 미성숙했던 10 중반의 어린 아이가 글이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을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빌립보 교회, 골로새 교회 교인들이 읽도록 사적인 편지를 썼습니다. 당시 교인이 많지 않았던 것을 감안하면 사적인 편지라고 있습니다. 편지글이 정경이 되어 성경이 됐을 우리는 사적인 편지글을 보며 21세기를 사는 우리가 어떻게 글을 받아들여야 하는지 생각을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기독교인들을 마구마구 잡아넣는 사람이었다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나고 역사적인 기독교 선교사가 인물입니다. 그의 미성숙했을 때의 행동이 기록되었지만 그는 여전히 사도로서 선교일을 있었습니다.

가지 교훈이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바울의 사적인 편지글을 성경 66권에 넣도록 하신 것은 우리가 글을 읽으며 우리가 사는 시대에 적용할 있는 근거를 주시기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가 교회에 글을 읽으며 과연 우리가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해석을 것인지를 고민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닌 그대로 옮겨서 적용할 경우 상당한 무리가 따르고 진리가 전달되지 않을 가능성이 큽니다.

만약 우리가 사도 바울의 편지글을 우리 교회에 해석없이 그대로 전달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사실 전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의 편지글은 팩트(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러나 진리가 아닙니다. 진리는 당시 사도 바울에게 주신 주님의 마음을 읽으면서 뜻을 헤아리면서 해석한 내용을 전할 그것이 진리가 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를 자유케하지 않지만 진리 우리를 자유케 합니다.

번째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바로 성숙하지 않았을 때의 , , 행동을 갖고 너무 지나칠 정도로 매도하는 우리의 미성숙한 행동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과거 미성숙한 행동이 문제가 되어 그가 사도로서 일을 하지 못했더라면 기독교 역사는 어떻게 됐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물론 당시 그런 문제가 지적되었을 것입니다. 실제 바울이 변화되었다는 말을 들었을 그의 회심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대체로 그의 과오가 용서되었기에 사도 바울은 예수님 이후 가장 위대한 선교사가 되었던 것입니다.

과거(!) 있던 사도가 사적인 편지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는 굉장히 중요한 이슈인 같습니다. 그런 관점으로 골로새서, 빌립보서, 고린도전서를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사실(facts) 보던 눈에서 진실(truths)이 발견될 것입니다. [밝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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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06 - 빌립보 교회와 고린도 교회(1)-대형교회가 좋은 교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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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는 사도 바울의  유럽 선교지인 마게도냐 지역 빌립보 도시의 교회에 편지입니다. 빌립보 교회는 고린도 교회와 비교하면 성숙도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창설된지 얼마되지 않은 같고 이방신을 섬겼던 사람들이 많은 교회였습니다. 반면 빌립보 교회는 복음을 받아들인 많이 성숙해져 바울의 깊이 있는 편지 받을 만한 교회였습니다.

교회가 고린도 교회와 비슷한데 빌립보서의 메시지를 전하면 사람들에게 닿지도 않고 메시지 전달이 정확히 되지 않을 것입니다. 반면 빌립보 교회에 고린도 교회에 했던 메시지를 그대로 전하면 신앙 성숙이 이뤄지지 않을 것입니다.

빌립보서의 내용이 개인적으로 위로가 되고 은혜가 되겠지만 교회라는 집단의 개념으로 읽을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개인 차원에서 메시지를 받는 아니라 교회라는 단체의 차원에서 읽을 제대로 해석을 하고 21세기에 적용을 있을 같습니다.

고린도 전서를 보면 하나님의 은혜와 자유보다는 질서가 강조됩니다. 은혜와 자유가 녹아져 있기는 하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질서를 훨씬 강조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유는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이방신에게 다시 돌아갈 가능성이 분별력이 약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내에서 분쟁이 극심합니다. 온갖 죄로 인해 교회의 질서가 무너질 있는 상황입니다.

빌립보 교회는 어떤가요. 빌립보서 13절부터 5절까지 보면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 교인들에 대해 기쁘고 감사한 마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내용을 살펴봐도 격려와 칭찬의 내용이 주를 이룹니다. 그러면서 새로운 도전을 그들에게 던져줍니다.

사도 바울은 현재 감옥에 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서는 옥중서신이라고 불립니다. 감옥에 있다는 것은 인간적으로 비참한 상황입니다. 가진 아무 것도 없습니다. 있는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감사가 넘칩니다. 감옥을 지키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할 있어서 좋고, 세상의 소유보다 예수를 소유한 것이 기뻐서 좋고, 이런 상황에서도 가슴 깊은 곳에서 샘솟는 기쁨이 좋고, 빌립보 교회의 돌봄을 받는 것이 좋습니다.

고린도 전서에 나오는 고린도 교회 같았으면 사도 바울이 이런 메시지를 전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21세기의 교회는 고린도전서를 읽으며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언젠가는 빌립보 교회처럼 되어야겠다 희망을 품어야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설교자들은 고린도전서의 내용을 마치 교회 밖의 세상 일인 것처럼 말하면서 세상과 교회가 담을 쌓도록 하고 빌립보 교회가 자신들이 리드하는 교회로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빌립보 교회같은 곳이 세상에는 있습니다. 드러나지 않게 빌립보 교회처럼  기쁨으로 움직여지는 교회가 있습니다.

하지만 요즘 눈에 보이는 교회들은 고린도교회의 모습입니다. 아직 성숙되기 전의 모습입니다. 빌립보 교회처럼 되기를 사모하다보니 설교자들은 빌립보서를 놓고 설교를 많이 하시는 같습니다. 그게 목회자들의 꿈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빌립보서의 내용을 암송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빌립보서에는 유명해진 구절이 많이 있죠.

Epistles of the Apostles
Epistles of the Apostles by simpologist 저작자 표시비영리

미국 교회와 한국 교회를 대체로 고린도교회와 비슷한 모습입니다. 빌립보 교회같은 교회는 있기는 하지만 드물죠. 또한 그런 좋은 교회들은 사실상 드러나지를 않습니다.

우리 교회가 마치 빌립보 교회인 것처럼 착각에 빠질 현실과 이상의 괴리가 생기는 것입니다. 이상은 빌립보 교회인데 현실은 고린도 교회이니 말입니다.

그렇다면 빌립보 교회는 어떤 교회이길래 사도 바울이 좋아하는 것일까요.

먼저, 싸움과 분쟁을 해도 귀엽게(?) 합니다. 서로 복음을 전하려고 싸움을 합니다. 바울은 이를 귀엽게 같습니다. 118절에 같은 경쟁을 기쁘게 생각한다는 말을 합니다.

고린도 교회에 나타나는 분쟁과는 차원이 다르죠. 고린도 교회에서는 나는 바울 편이다, 아볼로 편이다와 같은 걸로 싸움을 했습니다. 오늘날 교회와 비슷한 모습이죠. 누구 목사 파다 누가 장로파라고 해서 분열이 일어나죠.

빌립보 교회는 또한 관용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4:5). 어려움 중에 자족하는 교회였습니다. (4:14). 사도의 사역에 참여한 유일한 교회였습니다. (4:15). 교회에서 무엇이 보이십니까? 저는 은혜와 자유가 보입니다. 관용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관용을 알게 됐음을 의미합니다. 바로 은혜입니다. 어려움 중에 자족한다는 것은 세상에서 자유하다는 말입니다.

성숙해 있는 교회이기에 사도 바울의 메시지는 굉장한 깊이가 있습니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1:21)

너희 안에 마음을 품으라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2:5-11)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4:6)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3:20)

이런 내용을 고린도 교회에 전했다면 도무지 무슨 소리인지 몰랐을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는 기독교의 기초에 대한 이야기를 했을 뿐입니다.

성숙한 교인, 교회에 대한 사도 바울의 메시지는 땅에서는 낮아질 있고 염려하고 고통할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고 그에게 의지하면서 살아가다보면 죽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초신자들에게는 너무 어려운 내용입니다. 초신자에게는 질서 말하면서 하지 말아야 것을 꼭꼭 집어주는 조금 낫습니다. 빌립보서를 읽으면서 자신이 속한 교회가 빌립보서에 나온 내용들이 경험되어지지 않고, 그러한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는다면 고린도전서, 갈라디아서, 골로새서가 훨씬 공감이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좋은 교회를 판단할 교회 건물 크기, 교인수, 시설, 교회 프로그램으로 판단합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와 빌립보서를 읽으면서 빌립보서의 내용과 공감되는 부분이 많은 교회는 규모에 관계 없이 좋은 교회라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여러분의 교회는 어떤 교회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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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3/365: SILENCE = DEATH
293/365: SILENCE = DEATH by malik ml williams [flickr-ing in and out] 저작자 표시비영리

성경을 읽을 때 중요한 포인트가 하나 있습니다. 적어도 지금 글을 쓰는 밝은터에게는 중요한 포인트가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렇기에 주인공인 하나님의 성품을 파악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주인공의 성품을 모른 채 책을 읽거나 영화나 드라마를 본다면 전체 내용 파악을 하는데 문제가 발생합니다.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하나님의 성품은 은혜, 자유, 질서의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 성품을 마음에 품고 성경을 읽을 때 오해가 덜 생깁니다. 저에게는 그랬습니다. 은혜, 자유, 질서는 상황에 따라 다르게 강조됩니다. 예를 들어,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쓸 때는 질서를 많이 강조하는 듯합니다. 고린도교회의 질서가 무너지니까 그런 어조로 편지 글을 씁니다. 그렇다고 은혜와 자유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은혜와 자유가 적절하게 포함됩니다.

신명기도 비슷한 것 같습니다. 전반적으로 질서가 강조됩니다. 하지만 여기에 예수님을 초대하면 생각이 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신명기 설교의 상황을 예수님의 시각으로 보면 은혜와 자유를 볼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숨겨진(?) 성품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하나님의 성품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구약을 읽을 때 무서운 하나님의 관점으로 읽으면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을 오해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우리의 자유를 빼앗고 우리를 괴롭히는 하나님이 되면 메시지를 제대로 받을 수 없게 됩니다.

신명기 24장에는 여러 규정이 나옵니다. 이혼은 제한적으로 허용됐지만 이혼한 여자가 다른 남자와 결혼한 후에 원래 남편에게 돌아가는 것은 하나님께 가증스러운 일이었으며, 갓 결혼한 사람은 군복무에서 제외되며, 유괴범은 사형에 처하며, 문둥병에 따르는 의식이 있어야 하며, 적시에 품삯을 지불해줘야 하며,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남겨둬야 할 이삭에 대한 규정이 있습니다.

이 규정을 21세기를 사는 사람들이 그대로 적용하면 어떨까요?

이 규정에서 보여지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자유입니다. 그리고 질서입니다. 첫째 남편은 여자에게서 뭔가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을 발견하고 이혼증서를 써줬습니다. 그리고 둘째 남편도 비슷한 사유로 이혼증서를 썼거나 사망을 했는데 이 여자가 첫 번째 남편에게 가는 것은 가증스러운(abhorrent) 일이라고 합니다. 21세기의 상황에서는 참으로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왜 가증스러운 것일까 생각을 해봅니다. 저는 이를 두 가지 의미에서 해석하는데 첫 번째는 남편이 여자가 싫어서 이혼증서를 써줬는데 다시 맞아들이는 것은 마치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겼다가 다시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은 일로 여기는 것으로 보입니다. 둘째는 여자에 대한 보호입니다. 여자가 함부로 다뤄지지 않도록 하는 보호법으로 보입니다. 정결하지 않은 여자는 돌로 치라는 규정이 당시에 있었기에 자칫 잘못 그런 여자로 몰려 죽음을 당할 수 있기에 보호하려는 규정으로 보입니다.

갓 결혼한 사람이 군복무에서 제외되는 것은 지금 적용해도 좋은 내용인 것 같습니다. 유괴범을 사형에 처하는 것은 조금 과하지만 유괴범이 법의 심판을 확실히 받게 하는 것은 꼭 필요하다고 봅니다. 나머지 품삯을 적시에 주는 것과 가난한 이들을 위해 먹을 것을 남기는 것은 시대가 지나도 계속 적용되어야 할 성경 말씀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자유, 질서를 마음에 품고 사는 사람은 연합을 꾀하며, 약자를 보호합니다. 또한 죄에 대해 은혜의 손길을 뻗칩니다. 교도소에 있는 분들을 위해 도움의 손길을 뻗칠 때 그들에 대해 은혜, 자유의 마음을 품고 있으면서 질서를 존중해야 합니다. 그들을 당장 풀어줘야 한다고 주장하면 이것은 하나님의 마음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들을 긍휼하게 봐야 하는 것입니다.

장동건3
장동건3 by Raymond.Kang 저작자 표시비영리

배우 장동건과 고소영이 사귄다는 소식이 한국 시각으로 어젯밤 자정 직전에 터졌습니다. 갑자기 터진 것에 의아하면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일본군 혈서 사건과 연관이 되는 듯한 느낌이 들어 영 찜찜합니다. 과거 연예인들의 사건이 많은 정치, 사회적 사건을 묻히게 한 것을 보면 왠지 냄새가 나는 것 같습니다. 사실로 보면 장동건과 고소영은 사귀는 게 맞습니다. 그러나 진실로 보면 그 사귀는 것이 왠지 정치적으로 이용된 듯한 느낌을 줍니다. 진실은 아무도 모릅니다. 그냥 우연히 그런 것일수도 있고, 진짜 정치적인 어떤 음모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처럼 사실을 볼 때 진실을 볼줄 아는 눈과 정보를 갖는 것은 중요한 것 같습니다. 사실은 사실에서 끝나지 않고 진실과 연관이 있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 진실은 하나님의 은혜와 자유를 허락하심입니다. 수많은 사건이 사실을 제공합니다. 그 사건들의 진실은 하나님의 은혜와 자유의 틀 안에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논쟁이나 토론을 할 때 사실만 가지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진실을 무시하면 엉뚱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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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히노끼
    2009/11/06 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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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황과 사실과 진실 어느것도 놓지 말아야 하는 것 같습니다.

A Little Perspective
A Little Perspective by loswl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고린도전서 15장과 16(마지막 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인간이 이 땅에서 이러쿵 저러쿵 말이 많아도 결국 죽음 앞에서는 모두가 심판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최종 심판에서 통과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인 인간 예수는 그러한 심판을 통과해 부활했습니다.

그 심판의 결과는 아무도 모릅니다. 죽음은 모든 논쟁의 정답을 주는 것입니다. 정답은 죽는 순간에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 찰나에 모든 게 결정이 납니다. 100m 달리기 선수가 10초 안에 달려야 하는 광속(?) 승부를 내듯이 죽음의 순간에 인생에서 우리가 쏟아놓았던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을 얻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후반부에 눈깜짝할 사이에 심판의 결과가 나온다고 했습니다. 죽음은 우리에게 해답을 주었습니다. 예수의 죽음은 우리의 죄를 해결했다고 성경은 적고 있습니다. 그의 죽음은 또한 부활과 연관이 되고 부활은 흙으로 빚어진 인간이 천국의 이미지를 갖도록 합니다 (15:49).

죽을 때 모든 승부의 결과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제 아무리 견고한 이론으로 무장하고 있었어도 죽음 앞에서는 그 이론이 무색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죽는데 무슨 이론이 필요하겠습니까.

고린도 교회는 온갖 혈기를 부리는 교인들로 가득했습니다. 죽음을 생각하지 않은 자들의 집합소였습니다. 예수의 죽음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죽음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기독교의 기본인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15장에서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가 죽음으로써 부활한 것에 대해 사도 바울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것을 믿는 자도 같은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죽은 후에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면 크리스천은 가장 불쌍한 사람이라고 그는 말합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죽으신 후 부활하셨고 이에 대한 증인과 증거가 너무나 많기에(고전 15:3-9) 믿을 수 있는 것이고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그의 길을 따라가게 되어 있다고 바울은 설명합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예수의 도덕성을 믿는 게 아니라 그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그의 길을 따라갈 수 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이런 길을 만드셨을까?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인간이 도덕으로는 율법으로는 도저히 천국문으로 들어갈 수 없기에 이러한 은혜의 길을 만드신 것입니다.

그에 대한 강력한 징표로 십자가 사건을 허락하신 것이고 그 사건은 우리의 죄를 속량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혼란의 연속입니다. 오늘날 미국 교회와 한국 교회는 혼동의 세월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미래에 우리에게 닥쳐올 죽음과 부활을 생각해 봅니다.

[고린도전서 연재를 마치며…]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 수 있는 연재였습니다. 고린도전서를 읽으면서 고린도교회는 교회를 시작하기 가장 어려운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21세기 미국과 한국도 교회를 시작하기 어려운 나라라는 생각이 듭니다. 기독교에 대한 신뢰가 점점 떨어져가고 있습니다. 고린도교회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희망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죽음과 부활을 보이셨다는 것은 우리에게 지울 수 없는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1세기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그 말에 위로가 됐을 것 같습니다. 21세기를 사는 우리도 그렇습니다. 그 사건이 유일한 희망입니다.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우리 인간은 미래를 알지 못한 채 사망의 길로 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미래를 알려주신 주님께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 미래를 다른 이들도 함께 알게 되면 좋겠습니다. 은혜와 자유를 주신 주님. 감사합니다.  [밝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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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11/06 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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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밀댓글 입니다
    • 2009/11/06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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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사합니다...스만이님..그리고 주님.

남성의 눈으로만 성경과 불경을 풀고, 남성 중심으로만 교단을 지탱하던 시대는 지났다. 이젠 종교도 변할 차례다. 대한성공회에는 여성 사제가 있고 미국성공회에는 여성 대주교가 있다. 원불교에선 여성 교정원장(조계종 총무원장에 해당)도 나왔었다. 지난주 독일에선 개신교협의회장에 처음으로 여성 목사가 뽑혔다. 한쪽 다리로 달릴 건가, 아니면 두 다리로 달릴 건가. 그건 ‘21세기 종교의 경쟁력’과 직결되는 문제다.

관련 글: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935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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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bama Meets With His Economic Recovery Advisory Board


성경을 읽어보면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 자유를 주시려는 하나님, 질서의 하나님입니다. 그런 분을 섬기는 사람은 은혜, 자유, 질서를 소중히 여기게 됩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게 됩니다.

교회라는 공동체는 바로 그런 하나님을 공동으로 알려고 하고 그의 성품 닮기를 공동으로 구하게 됩니다. 그런데 21세기 교회는 그러한 모습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1세기의 고린도교회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당시 교회는 21세기 오늘날 교회와 비슷한 모습이 많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부터 14장까지는 그리스도 공동체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나옵니다. 12장부터 14장까지 읽을 때 우리는 보통 영적 은사와 사랑을 생각하지만 사도 바울이 진짜로 하고 싶은 이야기는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공동체가 되자는 것입니다.

영적인 은사와 사랑이 인간의 노력이 아닌 머리가 되시는 예수님의 은혜, 자유, 질서 안에서 행해질 때 개인과 공동체가 아름다워질 수 있다는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은 은혜, 자유, 질서의 하나님인데 예수님은 바로 이러한 성품을 완벽하게 이 땅에서 표현해낸 유일한 인간의 형상으로 오신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그 자체로 은혜요 그 자체로 죄에서의 자유요 그 자체로 질서입니다. 그가 머리가 되기 때문에 질서가 잡히게 된 것입니다.

은혜, 자유, 질서를 생각하며 고린도전서 12장의 영적 은사를 읽으면 생각이 좀 달라집니다. 영적 은사는 개인이 잘나서 받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자유 그리고 공동체의 유익(질서)을 위해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영적인 은사를 개인적으로 받는 것으로 착각을 하게 됩니다. 한 몸에 여러 지체가 있는 것처럼 영적인 은사도 그러한 개념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한국인은 그런 개념이 이해가 잘 됩니다. 그러나 미국인은 조금 어렵습니다. 개인주의적인 사고 방식이 강하기 때문에 영적 은사가 개인적으로 받는 은사로 오해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미국인이 잘 이해하는 부분은 몸의 지체 중에 약한 것을 더 중요시 여겨야 한다는 점입니다(고린도전서 12장 후반부). 한국인은 그것에서는 약합니다. 나영이에게 평생 쓸 배변 주머니를 제공한 곳은 미국 업체의 한국 지사였습니다. 그렇게 이슈화 되어도 정작 나영이 가족에게 혜택을 주는 데 인색한 한국 사회입니다. 약한 자를 귀중히 여겨야 한다는 1224절 말씀을 미국 사회는 비교적 잘 이행하고 있습니다. 물론 완벽하지는 않습니다. 한국에 비해서는 약간 낫다는 말입니다.

핵심은 공동체 안에서 약한 지체를 존중해야 한다는 것, 공동체 안에서 영적 은사가 있어야 한다는 것, 공동체 안에서 사랑의 은사를 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질서의 하나님을 섬기고 있기 떄문입니다.

사랑장으로 알려진 고린도전서 13장은 한 개인이 사랑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공동체 안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체험할 때 그 사랑에 감전되어 조금이나마 사랑을 전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사랑은 오래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사랑은 교만하지 않고등의 내용은 사실 인간이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이 이렇게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앞에 예수님이라고 말을 붙이면 말이 됩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오래참고, 예수님의 사랑은 온유하며, 예수님의 사랑은 교만하지 않고등으로 하면 말이 됩니다.

고린도전서 전체 내용을 보면 예수님이 우리의 머리되시기 때문에 그를 따르는 것은 곧 사랑을 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4장에는 예언의 은사, 방언의 은사 등에 대해 나오는데 이 모든 것도 예수를 머리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세운 공동체 안에서 질서 있게 행해져야 한다고 나옵니다. 이웃과 공동체를 세우는 은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질서를 무너뜨려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공동체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은사는 차라리 없는 게 낫습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가 소위 특별한(?) 은사를 받은 자에 의해 질서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누가 병고친다고 하면 우르르 몰려들고, 기적을 일으킨다고 하면 자기 교회는 무시하고 그 집회로 몰려다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최고의 은사는 사랑이라고 했는데, 기적의 은사에 집중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고린도교회는 분열되려고 했던 교회입니다(11:18). 고린도 교회는 과거 우상숭배자들로 가득했던 교회입니다(12:2). 고린도교회는 어떤 은사가 최고인지 논란이 있었던 교회입니다(12:1-3). 그야말로 혼란의 교회였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그런 것 같습니다. 대혼란의 상황입니다. 뭐가 진리인지도 모른 채 이리저리 휩쓸리고 있습니다.

교회는 다시 기본으로 돌아가야겠습니다. 교회의 기본은 머리인 예수를 섬기는 것, 그의 대속을 믿는 것, 그의 부활을 믿는 것, 그리고 그의 은혜, 자유, 질서의 메시지를 붙잡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가족, 교회, 커뮤니티, , 국가, 지구촌이 모두 공동체입니다. 이 공동체를 예수의 은혜, 자유, 질서의 메시지를 품고 운영하고, 공동체에 참여할 때 평화가 유지되는 것입니다 (14:33).

이런 관점에서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을 보면 그는 은혜, 자유, 질서에 대한 메시지를 비교적 균형되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는 비교적 인내심이 있고, 비교적 친절한 편이며, 비교적 자랑을 하지 않는 편이며, 비교적 무례하지 않고, 비교적 불의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은혜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의 행동입니다. 그는 시민들의 자유를 원합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공산주의자라는 엉뚱한 레이블을 붙이고 있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그가 질서 안에서의 자유를 선언한 지도자라고 생각합니다. 자유란 아무렇게나 하도록 내버려두는 게 아니라 어떤 틀 안에서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자유입니다. 미국이 그동안 외쳤던 자유는 방종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오바마를 하나님이 세우신 미국 대통령으로 생각합니다. 그는 1세기 고린도 교회와 같았던 미국이라는 공동체에 사도 바울과 같은 메시지를 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는 오바마가 구세주와 같다고 합니다. 틀린 말입니다. 구세주는 오직 예수뿐입니다. 오바마는 적어도 정치계에서는 사도 바울과 비슷하다고 하는게 더 나은 표현 같습니다. 비슷하다는 것은 같다는 말은 아닙니다. 정치계에서는 그런 느낌을 준다는 말입니다. [밝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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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감독 이창동 (2007 / 한국)
출연 송강호, 전도연, 조영진, 김영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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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117절부터 34절까지는 오늘날 미국과 한국의 기독교를 제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썼던 편지 글이 오늘날 상황에 어쩌면 그렇게 잘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현재 고린도 교회는 예수를 기념하는 성만찬을 하면서 분열과 분파로 가득하고 가난한 자를 돌보지 않고 이웃과 협력을 하지 않는 문제의 그리스도인들의 집합소입니다.

오늘날 교회를 봅니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비슷한데, 성만찬은 매주 또는 한 달에 한 번 하면서 교회가 얼마나 분열과 분파로 가득한지 교회 밖의 분들도 알 수 있을 정도입니다. 가난한 자를 돌보지 않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처럼 되어 있고, 이웃들과 협력하지 않는 집단으로 악명이 높습니다. 너무나 많은 교리, 교회법, 논리들이 기독교의 세상과의 협력을 막고 있습니다.

그런데 매주 예배를 드리고 매주 또는 매달 성찬식을 합니다. 이웃과 평화를 유지하지 못하면서 떡을 떼고 잔을 마시는 게 무슨 소용이 있냐는게 사도 바울의 오늘 메시지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개독교라고 해서 엄청난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안티 기독교 세력이 얼마나 많은지요. 솔직히 어떤 부분에서는 그들의 활동이 이해가 될 때도 있습니다. 제 자신을 포함해서 하는 짓이 가관입니다. 내가 나를 봐도 기독교에 믿음이 가질 않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이런 비난의 화살이 우리에게는 약이 될 수 있습니다. 계속 지적을 받다보면 잘못을 알게 되고 조금씩 고쳐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이 지적을 하는 것은 그만큼 기대가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통해 우리를 징계하고 계신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겸허한 마음으로 그들의 지적을 받아들이며 개선하고 개혁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 1132절은 위로가 되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징계는 우리가 더 잘될 수 있도록 하는 징계입니다. 비평이 있어야 좋은 작품이 나오듯, 강한 비난을 통해 기독교가 좀 더 견고한 종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동안은 너무나 성장 위주의 기독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앞뒤옆 돌아볼 여유도 없었습니다. 이제는 속력을 줄이고 견고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33절의 내용처럼 형제를 기다려줘야겠습니다. 분쟁도 줄여야겠습니다. 파당도 없애야겠습니다. 판단 받는 모임이 되지 않도록 해야겠습니다.

그럴 때에 예수님의 살과 피를 기념하는 성찬식이 진정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 주일에 드리는 예배에 감격이 있고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야 우리는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할 수”(11:26) 있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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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철학자인 아서 홈스는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다’라는 말을 합니다. 심리학이건 생물학이건 어떤 영역에서 발견된 진리는 모두 하나님의 진리라는 것입니다. 잡지나 신문에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진리가 있습니다. 기독교 신학에서는 성경에 나오는 ‘특별 계시’ 외에 ‘일반 계시’가 있다고 말합니다. 한편 성경을 제대로 읽으면 일반 학문의 진리를 탐구하는 데에도 유용한 영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성경 안에도 과학이 있고 문학이 있으며 정치학이 있습니다.”

“교인 하나 하나가 가정·직장·사회에서 건강한 삶을 영위하는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지구촌교회는 교회 안에서만 열심히 하려고 하지 말고 직장에서 봉사하고 직장을 더 아름답게 섬기라고 강조합니다. 건강한 부부관계도 중요합니다. 상담실이 운영되고 있는데 종교와 무관하게 모든 분에게 개방돼 있습니다. 부부치유 사역, 결혼 전 신혼부부 예비학교도 있습니다.”

관련 기사: 성경 안에도 과학·문학이 있고 성경 밖에도 진리가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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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d Friday
Good Friday by {the twinkling of an eye} 저작자 표시비영리

구약성서 신명기에 나타난 주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입니다. 주제를 안 상태에서 읽으면 얼마나 은혜가 되는 책인지 모릅니다. 이 책을 율법책으로 읽으면 이렇게 힘든 책도 없습니다.

신명기 23장은 전체 주제를 나타내주는 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을 믿는 백성을 다른 신을 동원해서 저주하는 민족이 나옵니다. 암몬족속과 모압족속입니다. 다른 신을 동원해서 저주하는 정도면 그 민족이 얼마나 사악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 민족과 함께 지내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에게도 전염이 되어 하나님께 등돌리게 할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기에 그런 민족은 사전에 사귐을 허락하지 않는 내용이 23장에 나옵니다. 발람을 동원해서 저주하는 민족은 10세대가 지나도 하나님의 공회(assembly)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는 명령이 나옵니다.

그러한 악한 족속들과 전쟁을 한다면 병사는 몸과 마음의 깨끗함을 유지해야 함을 23장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냥 단순한 세력 싸움이 아니라 영적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실제 전쟁 상황에서도 그렇고 영적 전쟁의 상황에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에 주 앞에서 불결함을 보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한 분 중에는 굉장히 중요한 축구 경기를 앞두고는 깔끔하게 샤워를 하고 축구 경기를 관전하고 응원한다고 합니다. 축구를 단순히 축구로 보는 게 아니라 전쟁과 같이 보는 것입니다.

주 앞에 나갈 때는 정결해야 하는데 이는 그에 대한 존경의 표시요 사랑의 표시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 중의 하나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듯이 이웃을 사랑하라는 메시지를 신명기 23장은 주고 있습니다. 어떤 노예가 주인을 피해 도망을 오면 함께 거주하면서 그 노예를 압제하지 말 것을 명하고 있으며, 형제에게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지 말고, 타국인에게는 돈을 빌려줄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타국인에게는 이자는 받으라고 합니다. 그래도 타국인에게 돈을 빌려준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21세기를 사는 사람에게는 신명기 당시의 상황과 조금은 다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신지 벌써 2천년이 지난 상황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과 이웃을 사랑하는 법은 좀 더 성숙하고 넓어져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함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좀 더 넓게 세상을 품으십니다. 인간이 품을 수 없었던 존재들마저 예수님은 품으십니다. 모세가 신명기 23장에서 설교한 내용은 당시 이스라엘 민족의 연약함 때문에 그렇게 했습니다.

우리에게는 인간으로 오신 예수가 있기에 좀 더 넓게 포용할 수 있게 됩니다. 그의 이름으로 나아갈 수 있기에 악한 세력도 이겨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명기 23장에서 배제되었던 고환이 상한 자, 음경이 잘린 자, 암몬족속, 모압 족속, 밤에 몽설(몽정)하는 병사, 에돔 사람, 이집트 사람, 창녀, 남창 등을 품을 수 있습니다.

예수의 피로 모두 씻음을 받을 수 있는 자들입니다. 예수의 피가 없었다면 이들을 도저히 이겨낼 힘이 없었던 사람은 이제 예수의 보혈의 능력으로 그런 것이 가능해졌습니다.

우리 안에 역사하는 악한 영과의 전쟁을 벌일 때 예수의 이름(in the name of Jesus)”의 능력이 얼마나 강력한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나 예수의 이름에 능력을 얻는 게 아닙니다. 예수의 보혈의 능력을 진정으로 믿는 자에게 그러한 능력이 생깁니다.

마음속에 이게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냐?”고 생각하면 예수의 이름은 능력을 발휘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지난 주말 미국은 할로윈 행사가 있었습니다. 할로윈 행사가 열릴 때 악한 영의 역사가 강력하다고 합니다. 어찌보면 발람을 동원하는 모압족속과 암몬족속의 풍습을 따르는 듯합니다. 구약식으로 하면 이러한 행사에는 절대 참여하지 말고 반드시 없애야 합니다.

그러나 믿는 자에게는 예수의 능력이 있습니다. 그의 보혈이 있습니다. 믿는 자는 그 어느누구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 이름을 믿는 자, 예수 이름을 부르는 자에게는 복이 있다는 게 바로 그 뜻입니다. 사악한 영의 공격을 받을지라도 보호되는 자들이 예수 이름을 믿는 자들입니다. 그 예수를 믿는지 정말로 확인해 봐야 합니다. 그것이 기독교인으로서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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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선원들은 해도를 제작하면서 두려움을 고스란히 드러냈습니다. 아직 가보지 못한 광활한 바다를 그리고 그 위에다 ‘이무기의 보금자리’, ‘악마의 집’, ‘귀신의 소굴’ 같은 지명을 적어 넣었습니다. 저마다 내면의 지도를 그린다면 곳곳에 비슷한 이름들을 붙이지 않았을까요? 부대끼고 싸우는 바다는 ‘이무기의 보금자리’라고 부릅니다. 따뜻한 기운이 사라진 바다에는 ‘악마의 집’이라는 문패를 답니다. 죽음과 영원한 세계가 시작되는 지점에는 ‘귀신의 소굴’이라고 표시해 둡니다. 여러분의 지도는 어떻습니까?

아직도 무시무시한 지명들이 즐비하다면, 헨리 5세 시대의 유명한 선장 존 프랭클린 경을 보고 용기를 내십시오. 당대의 탐험가들이라면 누구나 그랬겠지만 그에게도 대양은 수수께끼로 가득 찬 세계였습니다. 하지만 동료들과 달리 존 프랭클린 경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해도를 새로 손에 넣으면 ‘이무기의 보금자리’, ‘악마의 집’, ‘귀신의 소굴’ 따위의 지명을 지워 버리고 거기다가 ‘하나님이 계신 곳’이라는 이름을 써 놓은 겁니다.

자신의 지도를 돌아보고 같은 표시를 해두십시오. 하나님이 존재하시지 않는 곳은 없습니다. 이사를 가든, 군에 입대를 하든, 승진을 하든, 퇴직을 하든, 입원을 하든 절대로 주님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는 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

「일용할 양식」/ 맥스 루케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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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속에 있는 예수(Christ in Culture)를 주관점으로 묵상 내용과 생각을 나눕니다. Since 2006/01 (http://blog.daum.net/bbjjp) by 밝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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